“저희들은 뭐 숨기거나 그러지는 말라고… 회장님의 유지(遺旨)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박준호(49) 전 경남기업 상무는 성완종(64) 전 회장의 장례를 치른 뒤 직원들에게 자장면을 사 주며 “본 대로, 아는 대로,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수사에 임하자”고 독려했다고 한다. 그러던 박 전 상무는 참고인 자격으로 14시간가량 검찰 조사를 받다 22일 새벽 피의자로 신분 전환과 함께 긴급체포됐다. 검찰의 강제수사에 대비해 CCTV를 끈 채 각종 자료를 없애버린 혐의가 포착됐기 때문이다.
수사팀이 파악한 경남기업 내 디지털증거 훼손 혐의자는 박 전 상무 외에도 많다. 수사팀 관계자는 “증거인멸과 관련해 지난 20일부터 긴급체포된 사람이 추가로 몇 명 있다”고 밝혔다. 수사팀은 이들이 지난달 18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임관혁)의 압수수색을 피했던 일부 민감한 자료들을 빼돌렸다고 의심하고 있다. 21일 재차 이뤄진 압수수색의 대상은 경남기업 지하주차장부터 성 전 회장 일가의 자택까지였다. 빼돌려진 자료들의 예상 동선에 집중됐다.
회장은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정치권 금품로비’를 폭로했지만, 그 유지를 받든다는 기업은 증거를 숨기는 꼴이다. 수사팀은 성 전 회장이 돌발적으로 폭로한 로비 책임에 휘말리기 싫었던 임직원들이 회장 사후에 증거를 인멸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성완종 리스트’가 나오기 전 경남기업을 수사하던 특수1부는 자금흐름 중 출처가 불분명한 32억원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이 자금이 정치권 로비에 활용됐는지 등 세세한 용처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사팀이 확인하려는 증거인멸은 경남기업 전·현직 임직원들에 대한 입단속이나 말맞추기 정황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수사팀은 이를 위해 지난 15일 휴대전화를 압수했던 성 전 회장의 측근 11명 외에 실무자들도 다수 불러 진술을 들어 왔다.
수사팀은 증거인멸 정황을 넘어 궁극적으로 숨겨진 자료가 과연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한다. 경남기업으로서 감추고픈 분식회계·횡령 관련 자료일 것이라는 예상이 크지만, 이는 현재 구성된 특별수사팀의 목적과는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 수사팀 관계자는 “이번 압수수색은 기존 특수1부의 것과 다른 성격”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성 전 회장의 로비를 뒷받침할 ‘비밀장부’를 인멸한 정황을 포착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리스트에 등장하는 8인 외에 정·관계 로비 자료가 더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수사팀 관계자는 “수사를 하다 보면 지류(증거인멸 확인)가 본류(리스트 실체 확인)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이경원 황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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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23 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