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이나 철학책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진다. 중요한 책이기는 한데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읽는데 힘이 들고 재미가 없다. 우리가 대니얼 데닛이라는 이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데닛이라면 어쩌면 우리를 과학책 읽기의 재미, 철학책 읽기의 기쁨으로 인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 터포츠대학 철학교수인 데닛은 신경과학, 언어학, 인공지능, 컴퓨터학, 심리학 등 최신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과 같은 철학적 테마를 연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학문적으로는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의 최전선에 선 대가’ ‘제2의 버트런드 러셀’ ‘미국에서 가장 폭넓게 읽히고 가장 논쟁적인 살아 있는 철학자’ 등으로 설명되는데, 그보다 자주 쓰이는 수식어는 ‘지구 최강의 지식인’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이기적 유전자’를 쓴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를 “나의 지적 영웅”이라고 불렀고, 인공지능과 로봇 연구의 개척자인 마빈 민스키 MIT 교수는 “지구를 대표하여 외계인과 맞설 단 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학책 저술가 중 한 명이자 데닛의 제자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작명은 “지구 최고의 지식 요리사.”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는 과학·철학계의 슈퍼스타 데닛의 진가를 일반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의미, 진화, 의식, 자유의지 등 도무지 접근하기 쉽지 않은 주제들을 능숙하고 경쾌하게 요리해서 먹음직스럽게 내놓는다. 독자들은 데닛이 이 주제들을 요리하는데 사용한 77가지의 레시피, 그가 ‘생각도구’ 또는 ‘직관펌프’라고 이름 붙인 기발한 방법들을 따라가면서 생각하는 법, 논증하는 법, 글 쓰는 법 등을 배울 수 있다.
11페이지 분량의 첫 번째 이야기 ‘실수하기’부터 저력이 드러난다. 해박하면서 예리하고, 직설적이면서 유머러스하다. 무엇보다 그는 뜨겁고 또 친절하다. 데닛은 실수하기를 배움의 가장 중요한 계기로,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생각도구로 설명한다. “실수는 단순한 배움의 기회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실수야말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이다.”
이 정도 얘기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렇다. 데닛은 이보다 훨씬 정교하고 도발적이면서 근본적인 얘기를 추구한다. 진화과학을 끌어들여 실수와 우연, 흠과 불완전함이 생물계 진화와 복잡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실수의 축적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다른 모든 종보다 훨씬 똑똑한 이유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실수가 마치 예술품인 양 머릿속에서 요모조모 뜯어보는 감정가가 되어야 한다”거나 “나는 연구과정에서 한 번도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극도로 신중한 철학자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많은 업적을 이루지 못하며, 그나마도 대담한 결과는 전혀 내놓지 못한다” 같은 대목들은 데닛의 스타성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해준다.
비평가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상대방의 주장을 야박하게 해석하려는 유혹”에 대한 경고를 담은 ‘레퍼포트 규칙’, ‘뭐든지 90퍼센트는 똥이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스터전 법칙’, 지적으로 부정직한 사람들이 어떤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불편한 진실을 양탄자 밑에 쓸어 넣는 짓을 일컫는 ‘오캄의 빗자루’ 등 기발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과정에서 흔히 범하는 실수나 오류, 관행, 한계 등을 돌아보게 하는 얘기들이 가득하다.
데빗은 12가지 생각하는 법을 소개한 1부를 마무리하면서 “간단한 범용 생각도구를 갖추면 한결 날카로운 감각으로 힘든 탐구 주제에 접근할 수 있다”며 2부로 독자들을 끌고 간다. 2부부터는 현대 지식계의 가장 뜨거운 주제들이 펼쳐진다. 의미나 가치는 어디서 나왔는가? 물질에 불과한 뇌에서 어떻게 의식이라는 특이한 현상이 나올 수 있는가?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의식을 가진 기계는 가능한가? 과학과 종교는 양립 가능한가?
이런 크고 묵직한 주제들 앞에서 한껏 긴장한 독자들에게 데닛은 특유의 유머를 던지면서 손을 내밀어 한 발 한 발 내딛게 한다. 그렇게 모두 77가지의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현대 과학과 철학의 최첨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간과 지식의 내부가 어떤 모양인지 알게 되고, 생각하는 힘이 부쩍 커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데닛은 일반인들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빅 퀘스천’에 대해서 질문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그 까다로움이나 복잡함 때문에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하면서, 그 길을 의미와 재미를 느끼며 걸어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지구 최고 지식 요리사’가 전수하는 77가지 레시피
입력 2015-04-24 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