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295명의 희생자 가족과 아직 시신도 찾지 못한 9명의 실종자 가족은 우리에게 기억해 달라고, 이 참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증인(witness)’은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그 아픔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귀한 생명이 죽었고 그 가족이 아파하고 있다는 것에 교회가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는 ‘공감 학습’이 필요합니다. 상대의 감정을 내 마음대로 추측하는 일을 주의해야 합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매우 클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교회의 조건 없는 지지와 지원이 필요합니다. 도덕적 판단보다 함께하는 것이 절실한 것입니다. 함께해야 하는 대상이 어디 세월호 희생자들뿐이겠습니까. 상처 입고 상처 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지를 필요로 하겠지요.
존 올트버그의 책 ‘우리는 만나면 힘이 됩니다’에 보면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저자는 고슴도치를 외로운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고슴도치는 떼로 다니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슴도치가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로움을 탈 때면 고슴도치는 이웃에게 다가갑니다. 그러나 북미산 고슴도치는 약 3만개의 가시를 몸에 지니고 있어 이웃들에게 다가서는 순간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히고 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슴도치의 딜레마이자 우리의 딜레마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나사로를 위해 흘린 그분의 눈물을 본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시므로 고통이나 슬픔 같은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는 행동입니다. 아파하시는 구세주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상처 입고 아픈 이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시기에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 늘 함께 하셨습니다. ‘함께함’이란 나사로의 죽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에 그대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눈물 연기를 하신 것도 아니고 인공눈물로 타인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시대의 어려움이나 인생의 결함들로 인하여 슬픈 일을 끊임없이 경험합니다. 주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것과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눅 6:21)”는 것을 삶으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함께 울면 슬픔은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은 “눈물은 약함의 표시가 아닌 강함의 표시이며 만개의 혀보다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한국교회가 눈물로 함께하므로 위로가 필요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김종생 온양제일교회 목사
[오늘의 설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입력 2015-04-23 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