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JP) 전 총리 이후 첫 충청 출신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됐던 이완구 국무총리가 결국 ‘죽은 자’(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 발목이 잡혔다. 정치권에서는 ‘충청의 맹주’ 자리는 물론 자신의 정치생명도 마감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올해 초 총리직 지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총리의 미래는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지난해 정국을 뒤덮었던 세월호참사특별법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정치적 역량에다 공직을 두루 거치며 다져온 업무능력, 충청권 민심을 장악한 배경 등으로 ‘포스트 JP’로 통할 만큼 각광을 받았다.
지난 2월 16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당시 자신과 차남의 병역, 재산형성 등 각종 의혹이 불거지긴 했지만 별달리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던 야당조차 충청권 민심을 의식해 그를 인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 총리의 40년 공직생활을 살펴보면 다른 정치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력을 발견하게 된다. 행시 15회에 합격한 뒤 충남 홍성군에서 공직의 첫발을 디뎠고,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사무관, 경찰서장과 지방경찰청장, 충남도지사 등을 거쳐서다. 정치는 물론 경제와 치안, 지방행정까지 두루 섭렵한 셈이다.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내다 3선에 도전하는 대신 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할 때부터 주목받았다. 초선 의원 시절 당적을 신한국당(새누리당 전신)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으로 옮기며 JP와 첫 인연을 맺기도 했다.
다시 당적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으로 옮겨 출마한 선거에서 당당히 충남도지사에 당선됐지만 그는 임기 중이던 2009년 12월 이명박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자 전격 사퇴했다. 이때부터 무려 4년간을 야인(野人)으로 지내며 차근차근 중앙 정치무대 복귀를 준비했다.
이 총리는 2012년 4·11총선에 도전하려 했지만 그해 1월 다발성골수종 판정을 받고 출마를 포기했다. 난치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두문불출하며 치료받고 신병을 극복한 그는 2013년 4·24재보선에 출마, 무려 80% 가까운 득표율을 올리며 3선에 성공했다.
여의도 정치 복귀 1년 만인 2014년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됐고, 그는 이때부터 세월호 정국을 수습하는 데 ‘올인’했다. 수없는 야당의 반대와 압박, 반발을 뚫고 정부발(發)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뚝심의 정치력’을 보였다. 여당 내 친박(친박근혜)과 비박(비박근혜) 세력으로부터 두루 지지를 받을 정도로 친화력도 발휘했다. 박 대통령은 이런 그를 주목했고, 지난 1월 말 정홍원 전 총리 후임으로 지명했다.
사실 이 총리의 운명은 자초한 측면도 다분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 전 회장의 ‘칼날’은 그가 “자원개발 비리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대국민 담화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앞으로 검찰 수사의 종착점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공직과 정치권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이 총리는 일단 그간의 역정을 접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성 전 회장과의 대질신문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검찰 소환을 목전에 둔 이 총리는 이제 정치생명을 접느냐 마느냐의 최대 고비에 도달한 모양새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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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22 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