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진영] 일장춘몽

입력 2015-04-22 02:09

조선 숙종 때의 소설 구운몽을 처음 접한 것은 오래전인 고등학생 때였다. 한 젊은이가 8명의 선녀와 꿈속에서 몽환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내용이라는 국어교사의 설명에 솔깃해 책을 찾아 읽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꿈에서 깨면서 결국 현실로 돌아온다는 결말에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작품의 주제가 ‘인생무상, 인간의 세속적 욕망과 부귀영화의 덧없음’이라고 말했다. 이를 포괄하는 한자성어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며, 시험에 꼭 나온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한바탕의 봄꿈’을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배운 대로 그렇게 받아들였다.

일장춘몽은 중국 송나라 때의 책 ‘후청록(侯鯖錄)’에 나온다. ‘적벽부’로 유명한 시인 소동파가 늘그막에 표주박 하나만 걸치고 유랑하는 것을 본 한 노인이 “지난날의 부귀영화는 한바탕 봄날의 꿈같구나”라고 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당송 시대 뛰어난 문장가 8인을 가리키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던 소동파의 쇠락한 모습에서 삶의 허무를 깨닫는다는 비유다.

나이 들수록 일장춘몽의 교훈을 절실히 경험한다. 힘과 돈이 많았던 사람들이 ‘봄꿈’에서 깬 후 후회하는 사례를 한두 번 본것이 아니다. 높은 자리에 있었던 인사일수록 미몽(迷夢)의 후유증은 커보였다.

이완구 국무총리가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야당은 물론 여권 내부에서도 사퇴 요구가 거셌던 탓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듯 하다. 성완종 파문이 불거진 후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하니 한편으로 딱해보였다. 짧은 봄꿈에서 깬 충격을 잘 추스를지 걱정이다.

‘위자패지 집자실지(爲者敗之 執者失之)’. 노자에 나오는 글이다. ‘하려는 자는 패하고, 붙잡으려는 자는 잃는다’는 뜻이다. ‘집착’을 삼가라는 경구다.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그가 만약 무리하게 총리가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차라리 깨지 않은 봄꿈을 계속 꾸고 있는 편이 훨씬 좋았을 텐데.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