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한 서양화가 A씨 유족은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 50점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심사 결과 3점만 받아들여졌다. 또 다른 작고 작가 B씨의 경우는 아예 한 점도 통과되지 못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 기증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조금씩 늘었는데 지난해 폭증했다. 장엽 제2학예실장은 21일 “2013년 11월 서울관이 개관한 효과를 보는 것 같다”며 “미술관이 확충돼 기증 작품들이 전시될 수 있는 여지가 커진 것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작품 기증 의사를 밝힌 사례는 올 들어 더 늘어나는 추세다. 장 실장은 “월 2∼3건씩 기증 의뢰가 들어온다. 와서 작품을 다 가져가라는 경우도 많다”면서 “10년 전만 해도 1년에 10여점 정도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라고 했다.
◇기증의 정치학=작품을 팔면 경제적 이득을 챙길 수 있는데 왜 기증을 할까. 현대미술을 관장하는 유일 국립기관이 갖는 권위에서 오는 무형의 보상이 크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작가라는 평판이 붙으면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는 상징성이 있다. 당연히 작품 가치도 오른다. C작가의 작품 10점 중 1점이 국립기관에 들어가면 나머지 9개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잘나가는 작가가 작품 1∼2점을 기증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기증 작품에 대해선 전시도 열어준다. 30점 이상의 경우에는 개인전이 가능하다. 작고 작가는 덕수궁관에서, 생존 작가는 과천관에서 열린다. 지난해 한국화가 송수남, 서양화가 정영렬 등의 기증 작품전이 열렸다. 소규모 기증은 과천관의 상설전시공간에 모아서 전시된다. 기증은 작품 구입 예산(올해 46억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을 확보하는 중요 수단이기도 하다.
◇깐깐 심사 통과해야=기증 의사를 밝히면 1차로 큐레이터가 현장 조사를 통해 작품을 선별한다. 한 번 거른 작품을 놓고 내외부 인사(내부 2명+외부 4명 이상)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된다. 유명 작가라도 기존 소장품 중 비슷한 경향의 다른 작가 작품이 소장돼 있으면 퇴짜를 맞는다. 심사는 미술사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시장에서의 작품 가격은 중요한 고려요소가 아니다. 전혀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 김영주의 앵포르멜 작품이나 김구림의 실험미술 작품의 기증이 결정된 것이 그런 예다. 대량 기증의 경우 한 작가의 작품세계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구성을 갖추도록 선별된다.
◇기증작가 정탁영 특별전=덕수궁관에서는 이런 심사과정을 거친 수묵추상화가 정탁영(1937∼2012) 개인전이 6월 28일까지 열리고 있다.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의 정탁영은 1960년 이 대학 출신이 주축이 된 묵림회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추상적 수묵화의 세계를 열었다. 80년대 이후에는 수묵화에 판화기법을 도입하는 등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2006년 심장병 수술 뒤 대규모 수묵화 작업이 불가능하자 칼 그림, 흙 그림, 바느질 그림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도록 시대별·분야별 작품 140여점이 전시중이다(02-2188-6040).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기획]‘국립미술관 공인’이란 권위에 작가 가치 상승 효과까지… ‘일석이조’ 미술작품 기증 늘었다
입력 2015-04-22 02:25 수정 2015-04-22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