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의구] 구겨진 총리 체면

입력 2015-04-21 02:30 수정 2015-04-21 20:49

이완구 총리를 처음으로 본 건 1990년대 초 광화문 시위 현장이었다. 명지대생 강경대군 폭행치사 사건 등으로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잇따르던 때였다.

당시 서울시경 형사부장(경무관)이었던 이 총리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크지 않은 키였지만 검은 가죽잠바를 입고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이 상명하복에 익숙한 여느 경찰관들과 달리 당당했다. 다른 경찰간부들은 광화문 주변 곳곳에 산재한 시위대 때문에 어수선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떤 위기상황 속에서도 냉철하게 타개책을 찾아낼 것 같은 용모였다. 당시 시쳇말로 ‘북극에 떨어뜨려놓아도 모피로 옷을 해 입고 살아 돌아올 것 같은’ 다부진 이미지와 함께 그의 이름 석자가 뇌리에 남았다. 강경대, 서울대 대학원생 한국원씨 사망 등 큰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그는 충남경찰청장을 끝으로 정계로 뛰어들었다.

요즘 이 총리를 보면 이런 첫인상과 거리가 먼 느낌이다. 위기상황을 타개하기보다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모습이다. 공무원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기보다 분열로 이끄는 듯하다.

‘성완종 리스트’ 이후 그의 행보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잇따른 해명 번복과 완고한 버티기 때문이다. 사건이 불거진 직후 이 총리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 “개인적 친분이 없다”고 했으나 4일간의 국회 대정부 질문 답변 과정에서 계속 말을 바꿨다. 핵심 사안인 2013년 4월 4일 재·보궐 선거지원금 3000만원 수수 의혹과 관련해서 그는 성 전 회장을 독대했다는 주장을 완강히 부인하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고 물러섰다.

반면 결백을 강조하는 화법은 강해졌다. 사퇴를 압박하는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 “돈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 물러가겠다”에서 “목숨을 내놓겠다”로 바뀌었다. 수위가 올라가면서 역설적으로 진실성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은 떨어졌다.

문제는 이 총리의 신뢰가 흔들리면서 국정이 같이 표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4·19혁명 기념식은 단적인 예다. 총리 때문에 야당 지도부가 불참해 별도 행사를 치름으로써 기념식장은 분열의 장이 됐다. “자유민주주의를 한층 더 성숙시켜 국가의 품격을 드높이고 세계 속에 당당한 선진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던 그의 기념사는 빈축의 대상이 됐다.

비단 4·19 기념식뿐 아니다. 그가 통할해야 할 행정 각부에 과연 총리의 영(令)이 제대로 설지 의문이다. 해외순방으로 빈 대통령의 자리를 채우기에 지금 상태의 총리로는 불감당으로 보인다. 온갖 패러디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총리가 국정을 이끄는 상황에 국민들의 냉소가 깊어질까 우려된다.

풍문이나 여론에 휘둘려 국정의 주요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비위 의혹의 실체적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당사자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는 게 온당하다. 하지만 상식을 넘어 원칙에만 얽매이는 것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한다. 총리가 져야 할 정치적 책임도 막중하다. 사법처리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 그루터기만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다.

이 총리는 가장 먼저 수사를 받겠다고 했지만 실체적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려면 대법원 판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법무장관을 포함한 장관들을 통할하는 총리가 직을 유지한 채 수사를 받는 것은 형사절차상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이 총리는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지금은 총리의 무죄 입증 때까지 대한민국이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격이다. 이럴 바에는 애초에 이 총리가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사의를 표한 다음 대통령이 결단할 길을 열어두고 수사결과를 기다리는 게 당당하지 않았나 싶다.

김의구 편집국 부국장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