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나라 조선은 개혁과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교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832년 독일인 선교사 귀츨라프가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1866년엔 영국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했다가 순교했다. 1874년 중국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존 로스 선교사가 의주 출신 한국인 상인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돼 한국인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의주 상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한글성경 번역에 착수해 1882년 랴오닝성 선양에서 최초의 한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인쇄했다.
이 과정에서 로스 선교사를 돕던 한국인 가운데 개종자가 나와 1879년 이응찬과 백홍준을 비롯한 4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한글성경을 국내에 배포하면서 전도했다. 그 결과 로스는 1884년 의주와 소래, 서울 지역에서 세례를 받겠다는 개종자가 100여명 넘게 생겼음을 서구교회에 알리면서 본격적인 한국 선교 착수를 촉구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서울의 양반 지식인 이수정이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가 도쿄에서 기독교인 농학자 츠다센을 만나 선물로 받은 한문성경을 읽던 중 개종을 결심하고 이듬해 4월 도쿄 로게츠죠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의 지원을 받아 1885년 1월, 한글로 번역한 마가복음을 인쇄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의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의 부탁을 받고 교리문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전도해 주일학교 형태의 집회를 시작했다. 1884년 3월에는 일본 주재 선교사들에게 “한국에도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편지를 작성, 해외선교 잡지에 실림으로써 ‘한국의 마게도냐인’(행 16:9)이란 별명을 얻었다.
간접 선교의 허락을 받다
이런 가운데 조선의 정치 상황도 바뀌어 오랜 쇄국의 빗장을 열고 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 개방 정책을 펼쳐나갔다.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인적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길도 열렸다. 1883년 조선 정부는 답례의 뜻으로 보빙(報聘)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민영익을 수반으로 하는 사절단은 40일간 머물며 미국의 산업과 경제·문화시설을 돌아봤는데 기차 안에서 목회자 한 명을 만나게 된다.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위원회 위원이었던 가우처 박사였다. 그는 민영익과 대화하는 중에 한국 선교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에 가우처는 1883년 11월 뉴욕의 감리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개척비 명목으로 2000달러를 기부하면서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매클레이는 한국 선교 추진 업무를 맡게 된 실무자였다. 그는 1884년 6월 23일 인천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외교 실무를 관장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협판(協辦·차관급)은 개화당 지도자 김옥균이었다. 매클레이는 6월 30일,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와 사역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의 장서(狀書)와 사역제안서를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전달했다. 사흘 후인 7월 3일, 매클레이는 김옥균으로부터 “국왕께서 제안서를 읽고 허락하셨다. 구체적인 사항은 더 논의해야겠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착수해도 좋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겸 통역관이었던 윤치호에 따르면 고종은 미국인의 병원 및 학교 설립과 전신 부설 등을 허락했다.
매클레이는 중국과 일본에서 의료와 교육사업을 통해 선교사역을 시작했던 경험을 살려 한국에서도 같은 방법을 썼던 것이다. 이로써 종교적인 분야(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는 아니지만 학교와 병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됐다.
장티푸스 발병 후 선교사로 결심
스크랜턴 가족은 어떻게 선교사로 지원하고 한국 개척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을까. 메리 스크랜턴의 며느리인 루이자 스크랜턴이 남긴 증언이 유일하다. 루이자는 1884년쯤 누군가 클리블랜드로 시어머니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남자는 루이자에게도 선교사로 가겠냐고 물었고 루이자는 거절했다. 정황상 이 남성은 일본 선교사였던 해리스였다. 안식년차 미국에 머물던 그는 매클레이로부터 한국 선교가 가능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스크랜턴 가족을 찾아 의향을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집안에 우환이 닥쳤다. 스크랜턴 박사가 그해에 지독한 장티푸스에 걸렸다. 얼마 후 회복된 윌리엄 스크랜턴은 자신은 중앙아프리카를 제외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나가기로 작정했다고 밝혔다. 루이자 역시 남편을 따라나서겠다고 결심했다. 선교를 결심한 배경에는 병을 간호했던 어머니의 설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1882년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일본 요코하마에서 사역하고 있던 친정 조카 엠마 벤턴의 조언과 권면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후 윌리엄 스크랜턴은 1884년 10월, 한국에 파송되는 첫 번째 선교사로 인준을 받았고 두 달 후인 12월 4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참고로 아펜젤러는 이듬해인 1885년 1월에 정식 선교사 인준을 받는다). 그는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선교사 지원자는 감독이 그 성품과 자격을 심사해 안수를 줄 수 있다는 미 감리회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처음엔 아들 내외의 선교를 지원할 생각이었다. 나이도 많아 직접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해외여선교회 지도자들이 독자적인 선교사역을 펼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인 메리 스크랜턴은 1884년 11월 볼티모어 메디슨에비뉴 교회에서 열린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중앙실행위원회 제15회 총회에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로써 스크랜턴 집안은 편안하고 익숙했던 생활을 등지고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약속의 땅’ 한국으로 출발했다. 그때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의 나이는 53세. 아들 윌리엄은 29세. 며느리 루이자는 25세였고 두 살짜리 손녀딸이 품에 안겨 있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3) 한국의 첫 감리교 선교사로 인준
입력 2015-04-21 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