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은 법이다. 스포츠 전력분석관들의 금과옥조다. 현대 축구에서도 전력분석관의 역할과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슈틸리케호'의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일정이 잡힘에 따라 한국 축구 A대표팀의 채봉주(35) 비디오 분석관도 바빠졌다. 지난 17일 경기도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채 분석관의 활동과 일과를 살펴봤다.
"경기 영상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편집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요. 제가 한 일이 우리 대표팀의 승리에 도움이 됐다는 생각이 들면 기쁘죠.” 채 분석관은 환하게 웃었다. 상대의 정보 수집은 분석관의 기본 업무다. 그는 5년째 태극전사들의 경기 장면과 훈련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상대의 경기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러다 보니 가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한다.
“2011년 쿠웨이트와의 브라질월드컵 3차 예선 원정경기 때 혼자 관중석 상단에서 촬영하고 있는데 쿠웨이트축구협회 관계자가 잔뜩 인상을 쓴 채 자꾸 촬영 장소를 옮기라고 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죠. 예전엔 상대 팀의 영상을 구하기 어려워 스파이처럼 몰래 촬영하기도 했어요. 요즘엔 영상을 구할 데가 많아 예전처럼 숨어서 촬영하진 않아요.”
채 분석관이 어렵게 영상에 담은 상대의 전술과 주요 선수들의 움직임 등은 보기 좋게 편집돼 선수단에게 제공된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의 전력분석관이었던 울리 슈틸리케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은 채 분석관이 준비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A매치 기간이면 슈틸리케 감독님은 하루에 짧게는 5시간, 길게는 8시간이나 제가 편집한 영상을 봅니다. 하루는 ‘비디오를 통해 선수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고 하시더군요.”
슈틸리케 감독이 선수들에게 투혼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을 때에도 비디오를 활용한다고 채 분석관은 귀띔했다. “정신 차리라고 백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비디오 한 번 틀어 주는 게 더 효과적입니다. 선수들은 자신들이 대충 뛰는 모습을 보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죠.”
그는 태극전사들도 영상 자료를 많이 활용한다고 했다. “손흥민, 기성용, 이청용, 구자철 등 대표팀의 핵심선수들은 파주에 소집되면 적어도 하루에 한 경기는 봐요. 특히 기성용은 제가 준비한 영상을 전부 가져가 보더군요. 그러니 경기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죠.”
전력분석관들은 태극전사들이 소집되면 비상이 걸린다. 코칭스태프는 밤마다 비디오 분석실에 모여 채 분석관이 편집한 영상을 보고 경기를 준비한다. “A매치 기간이나 월드컵, 아시안컵 등 국제대회 기간엔 새벽 3∼4시까지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밤의 황제’예요. 하하하….”
그렇다면 상대 전력을 분석한 효과는 어느 정도일까? 채 분석관은 이렇게 설명했다. “경기 전 상대 전술과 선수들의 움직임을 알고 모르고는 하늘과 땅 차이예요. 상대 팀이 측면 공격을 할 때 밖으로 빠져서 크로스를 올리는 걸 좋아하는지 아니면 안으로 파고들어 골을 노리는 걸 좋아하는지 미리 알면 수비 때 큰 도움이 됩니다.”
지난 1월 열린 2015 호주아시안컵 당시 ‘슈틸리케호’에 합류해 상대 팀들의 전력을 분석하며 준우승에 힘을 보탰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땐 ‘이광종호’의 금메달 획득을 돕기도 했다.
이제 그의 눈길은 6월부터 시작되는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 쏠려 있다. 2차 예선에서 맞붙는 상대들이 약팀이기 때문에 더 긴장된다는 게 채 분석관의 고백이다.
“약팀이라고 전력 분석을 소홀히 했다가는 그야말로 참사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축구에선 언제나 이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약팀이라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채 분석관은 한국과 함께 G조에 편성된 쿠웨이트, 레바논, 미얀마, 라오스의 경기 영상 확보 작업에 들어갔다. 상대 팀들의 경기 영상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힘든 작업이다. 경기 영상을 확보하는 방법은 ‘영업 비밀’이라고 했다. 채 분석관은 한 팀당 최소 5경기 이상의 영상을 분석해 대표팀에 제공할 계획이다. 최소 20경기를 분석하고 편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분석관이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당연히 우리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거나 A매치에서 이겼을 때입니다. 또 선수들한테서 많은 도움이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보람을 느끼죠.”
A대표팀의 유일한 비디오 분석관인 채 분석관은 대한축구협회의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이다. 그렇지만 슈틸리케 감독 등 한국 축구 지도자들이 갑자기 필요한 영상을 찾을 수 있어 파주 NFC에 상시 대기하며 외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파주=김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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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정보戰, 최전방 공격수… ‘슈틸리케의 눈’ A대표팀 비디오 분석관 채봉주씨
입력 2015-04-21 0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