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워싱턴DC 국무부청사의 딘 애치슨 강당. 한·미·일 3국 외교차관급 회의를 마친 조태용 외교부 제1차관과 토니 블링큰 미 국무부 부장관, 사이키 아키타카 일 외무성 사무차관이 기자회견을 위해 연단에 섰다. 회동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강당에 들어서는 세 사람의 표정만 봐도 확연했다. 사이키 차관은 얼굴에 웃음까지 띠며 여유 있는데 반해 조 차관의 얼굴은 굳어 있고 상기돼 있었다. 목소리도 약간 쉬어 있었다.
이번 협의회는 오는 29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 의회 연설 전 마지막 3국 고위 당국자들의 만남. 조 차관은 이번 회동에서 “아베 총리가 올바른 역사인식에 대한 메시지를 발언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력히 주문하라는 훈령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일 2자회동에서 사이키 차관은 ‘아베 총리도 그동안 그런 역사인식을 밝혀 왔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한 듯하다. 특히 블링큰 부장관도 동석한 3자회동에서 조 차관의 거듭된 과거사 문제 제기에 두 사람은 한 마디도 않고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한국 측이 ‘목이 쉴’ 정도로 아베 정부의 과거사 왜곡 문제를 제기한데 대해 미·일 측은 침묵으로 응대한 셈이다. 이 장면은 일본의 역사인식과 관련해 벌어진 3국 간 외교 줄다리기의 결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리 한국과 미국 당국자들이 부인하지만 현재 미국 정부의 역사 문제에 대한 입장은 ‘과거 거론은 그만, 미래를 보라’로 요약된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한 아베 총리의 진정한 태도 변화가 없는 가운데 이뤄진 미국 정부의 이런 ‘황급한’ 입장 전환은 미국 내 보통사람들의 양식에도 반하는 것이다.
평소 외교안보 문제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한 미국인 지인이 최근 전화를 했다. 그는 12일 방영된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 대사의 CBS방송 ‘60분’ 인터뷰를 한번 보라며 케네디 대사의 위안부 관련 답변을 개탄했다. 이 인터뷰에는 케네디 대사가 “이젠 우리의 관심사는 한·일 간 협력”이라고 답하자 인터뷰어인 CBS뉴스 노라 오도넬 기자는 “그렇지 않다. 진실은 일본군이 수천명의 여성을 전쟁 중 성노예로 삼았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역사를 호도하려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케네디 대사를 압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처럼 미국 정부의 동북아 과거사 문제에 대한 입장 변화가 상당수 미국 보통사람들의 정서와 괴리가 있음에도 미국 언론에서 이를 따끔하게 지적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워싱턴DC에서 열리는 각종 정책 현안에 대한 세미나나 토론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 궁금한 게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오는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이 필수 코스처럼 들러 의견을 청취하던 여러 동북아·한국 전문가들은 왜 침묵할까 하는 것이다. 특히 워싱턴DC에는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교수 등 우리 정부와 기업의 돈으로 자금을 댄 ‘한국연구 석좌(코리아 체어)’도 2명이 있다. 한·일 관계라는 민감한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자신들에게 손해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입장을 대변하라는 게 아니다. 아베 총리가 미 의회 연설과 종전 70주년 기념 연설을 입에 발린 수사로 넘어간다면 한국은 물론 아시아 각국과의 진정한 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며, 이는 장기적으로 일본은 물론 미국의 국익에도 해가 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지적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평소 일부 한반도 전문가들의 성실성과 연구 결과의 질(質)에 의문을 가져온 기자로서는 이들의 침묵이 그동안의 회의를 입증하는 듯해 씁쓸하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
[특파원 코너-배병우] 한국전문가들 다 어디 갔나
입력 2015-04-20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