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忍道가 된 人道 보행자는 괴로워… 멀고먼 ‘걷기 좋은 거리’

입력 2015-04-18 02:20

이화여대 대학원생 최모(24·여)씨는 서울 서대문구 학교 정문에서 신촌역(경의중앙선) 사이 구간을 걷기가 늘 힘들다. 폭이 좁은 인도 곳곳에 음식을 파는 트럭이 들어서 있고 그나마 남은 공간은 인근 상점들이 내놓은 가판이 점령했다. 행인들은 인도에서 밀려나 차도를 걸을 수밖에 없다. 일방통행로를 지나는 차들은 경적을 울리기 바쁘다. 밤이라고 다르지 않다. 최씨는 17일 “밤이면 상점에서 내놓은 대형 쓰레기봉지로 길이 막힌다”고 말했다.

대학생 박모(25)씨는 지난 주말 서울 강남대로 지하철 강남역∼신논현역 구간을 걷다가 진땀을 뺐다. 유동인구가 많은 데다 인도 한가운데에 어른 키만한 화분이 중앙분리대처럼 줄지어 놓인 탓에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인 ‘인도’(人道)가 불편을 무릅쓰고 걸어야 하는 ‘인도’(忍道)로 전락하고 있다. 인도 위의 ‘보행권’을 규정한 법이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걷기 좋은 거리’는 먼 나라 얘기다. 지난해 경기도 판교 환풍구 사고 이후 인도 한가운데에 놓인 환풍구들이 보행 안전을 위협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무서워서 환풍구를 피해 걸어야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환풍구를 피하더라도 걷기를 포기해야 할 곳은 부지기수다.

서울시의회 코리아나호텔 앞, 시청역 9번 출구 신한은행 본점 앞, 삼청동, 방화1동 일대 등은 인도가 지나치게 좁거나 없어 보행이 어려운 길로 꼽힌다. 박씨는 “좁은 인도에 쌓인 잡다한 물건, 입간판, 쓰레기봉투, 인도까지 넘어와 주차한 차들, 줄지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노점상까지 합세하면서 막힘없이 걷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곳이 많다”고 말했다.

인도 주변의 공사현장은 노골적으로 보행권을 침범한다. 직장인 김모(30)씨는 지난 4일 서울 강북구 수유사거리 인근 인도를 걷다 신발에 시멘트 덩어리를 잔뜩 묻혔다. 공사현장 차량에서 흘러내린 시멘트가 3m 길이로 인도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지만 스마트폰을 보느라 미처 피하지 못했다. 직장인 전모(27·여)씨는 지난달 29일 서울지하철 2호선 합정역 인근 인도를 걷다가 포크레인에 치일 뻔했다. 인도 바로 옆에는 낡은 다가구주택과 상가를 허물고 새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건설 중장비가 수시로 드나드는 데다 건설장비, 자재 등이 인도에 가득 쌓여 있었다. 전씨는 “일본에서는 인도 근처에서 공사를 해도 자재가 보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치하는데 우리는 보행자들이 알아서 피하라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보행자를 보호하는 법은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도로의 구조 시설기준에 관한 규칙’은 보도의 유효 폭을 최소 1.5m 이상으로 하고, 보행자 통행경로를 따라 연속성과 일관성이 유지되도록 설치하게 돼 있다. 가로수 등 노상시설을 설치할 때는 이만큼을 추가로 확보해 1.5m를 맞추도록 한다.

그러나 이 법은 있으나마나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17일 “법 제정 전에 만든 길에 이 규정을 소급 적용하기는 불가능하고, 새로 만든 길은 준수하도록 한다. 다만 도로 폭이나 주변 상황에 한계가 있어 엄격하게 적용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수시로 보행자를 위협한다. 자전거는 도로교통법상 차로 분류된다. 회사원 이모(25)씨는 “지난 12일 서울 용산역 주변의 인도를 버젓이 질주하는 오토바이에 치일 뻔해 세웠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며 “위험천만”이라고 했다. 경찰청은 지난달부터 오토바이 운행이 많은 654곳을 ‘이륜차 질서 확립존’으로 지정해 단속하고 있다. 지난달 1∼26일 2508건이나 적발했다.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인도를 주행하다 적발된 건수는 2011년 1448건, 2012년 2478건, 2013년 4993건으로 증가세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인도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인도 10계명’을 발표했다. ‘보행권’ 침해가 워낙 심각해서다. 이 10계명을 보더라도 인도는 보행자의 길이 아니다. 10계명에는 공중전화·우체통의 단계적 철거, 횡단보도·환기구 턱 낮추기, 가로수·소화전·분전함 위치 이동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