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 현대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 이 책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쓰인 역사소설이다. 소설은 한 신실한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인 페레이라가 배교했다는 소식이 보고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이를 확인하려고 뒤따라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은 당시 일본이 어떻게 외국 선교사들을 배교시켰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신앙을 가진 농민들을 코와 입을 꿰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 죽였는데 농민들 자신이 배교한다고 해서 풀어주지 않았다. 그 사람을 전도한 선교사까지 배교해야만 풀어주었다. 선교사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농민들의 소리를 계속해서 들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에게 먼저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는 이렇게 외쳤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야. 이 엄청난 핍박 속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농부들이 구덩이에 넣어진 뒤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
고난과 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 시험에 빠진 신부처럼 위기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구약의 욥도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욥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숨어계신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욥에게 “하나님이 숨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욥은 지상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다.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며 우리 중 대부분은 그와 같은 고난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 문제와 씨름할 때 해결의 열쇠를 발견한 것은 미국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에서였다. 그는 저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에서 “하나님에 대해 전혀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다. 그런데 신자들이 동일하게 체험하는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체험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았던 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것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 있었다는 고백을 한다. 심지어 예수님도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셨다(마 27:46).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전해진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회복을 간구했으나 멸망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숨으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의 숨으심은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위대하신 계획과 능력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이 숨어계시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기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일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단순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만 원했다면 자신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숨어계시는 기간은 우리 믿음이 자라는 기간이다. 하나님께서 숨는 이유는 인간에게 발견되기 위함이다. 숨바꼭질을 회상해보라. 숨바꼭질의 즐거움은 숨는 데 있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발견되는 것에 있다. 독일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은 먼 곳에 숨어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
고난은 때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치를 살짝 알려주시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이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은 자신이 발견되기를 기다리신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믿음은 더욱 강건해질 것이다.
이재훈 (온누리교회 목사)
[이재훈 칼럼] 숨어계시는 하나님
입력 2015-04-18 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