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년, 갈등을 넘어 치유로] “진상규명·반성… 사건 종결됐다는 마음 가져야 치료 가능”

입력 2015-04-17 02:19
전문가 2인의 조언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 끔찍한 일이 있었다. 극우 테러리스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7)는 오슬로 정부청사에 폭탄을 터뜨리고 집권 노동당 청소년 집회가 열리던 우토야섬을 찾아 70분간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77명이 사망했고 242명이 부상했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이날을 잊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피해자와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우토야섬을 평화의 섬으로 만들자는 제안 앞에 빈부의 격차도, 이념의 대립도 없었다. 호텔 체인을 보유한 억만장자 페터 스토르달렌(48)은 국제적 공개 모금을 시작했다. 우토야섬 복구비용 가운데 3분의 1을 직접 부담하겠다고 밝혔다. 사회 전체가 피해자 가족의 회복을 도왔다. 유가족들은 이후 아픔의 장소인 우토야섬으로 ‘치유 여행’을 다닌다.

2012년 참사 1주기를 맞았을 때 옌스 스톨텐베르그 당시 노르웨이 총리는 “(브레이비크는) 폭탄과 총격으로 노르웨이를 바꾸려 했으나 우리 국민은 우리의 가치를 포용하는 것으로 응답했다”고 평가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다시 팽목항에 가는 길은 아직 치유의 여정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들 앞에서 ‘치유’는 감히 먼저 꺼내기 어려운 말이다. 치유는 병을 낫게 하는 일인데, 유가족은 자신의 아픔이 어디에서 온 건지부터 정확히 알고 싶어 한다. 고통에서 헤어나오는 것보다 진상규명이 그들에게는 우선이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 사회가 입은 상처도 지난 1년간 더 곪아 왔다. 정신건강 의학자들은 ‘집단이 앓고 있는 병’이 참사 이후 적나라하게 나타났다고 말한다. 사회의 그릇된 시선과 인식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유족과 우리 모두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다.

참사 이후 8개월간 안산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장으로 일한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국립춘천병원장을 맡고 있는 박종익 강원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두 전문가에게 세월호 참사와 치유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아직 치료받을 때가 아니다”



김 교수는 경기도 안산에서 유가족을 지켜보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시점을 엿봤다. 1년이 지났지만 그가 기다리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유가족이 아직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어서다.

“대부분 ‘나는 아직 트라우마를 치료받을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위한 건 ‘인양하고 나서, 진상규명하고 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저희의 경험으로도 사건이 종결됐다는 마음을 본인이 가져야 비로소 본격적인 치유가 가능합니다.”

박 교수는 자식 잃은 부모의 고통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이들은 민감한 질문이나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우려보다 쉽게 정신적 상처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는 다릅니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뭘 하겠다’는 의지가 생기면 다소 회복되지만 그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다시 악화되는 악순환이 펼쳐지거든요.”

유가족은 지난 1년간 ‘2차 외상’을 입었다. 구조와 사고 수습, 추모, 배·보상, 선체 인양 등 사안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무능력에 또 다시 상처를 받았다. 극우 세력의 비난과 조롱, 몇몇 정치인의 돌출 발언 등은 훨씬 복잡한 상처를 남겼다. 김 교수는 이러한 2차 외상으로 유가족 가운데 자살 시도를 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인재(人災)로 억울하게 자식이 죽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비난당하는 상황이 됐어요. 돈 문제도 밖에서 먼저 거론했고요.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도 유가족들이 버틴 건 ‘죽을 때 죽더라도 진상을 알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공감할 시기를 놓쳤다



정신건강 의학자들은 트라우마 치유에서 ‘공감’을 핵심 개념으로 본다. 직접 아픔을 겪은 사람과 주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같은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서 상처가 아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딱하게 여기거나 동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지난해 참사 직후, 정부가 구조에 실패했다면 진정으로 반성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갔으면 상황이 좀더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유가족의 눈치를 봤을 뿐 공감할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이든 유가족이 요구해야 일이 진행되다보니 공감과 연대는 사라지고 분열과 갈등만 남았다.

김 교수는 공감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고 했다. “유가족이 원하는 것은 자선이나 구호가 아닙니다. 지지와 연대, 동참 이런 것이죠. 유가족이 특히 힘들었던 건 여야 국회의원들과 세월호 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이었어요. 그들은 공감하려 하기보다 유가족 요구에 의해서만 움직이려 했죠.”

박 교수는 보상 문제도 공감을 토대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가족들은 돈 다 필요 없으니 원상복귀시켜 달라는 욕구가 강합니다. 이 때문에 보상에 대한 전문가의 냉정한 시각과 당사자의 상실감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생깁니다. ‘내 상처는 얼마짜리다’라고 수치화하는 순간 더욱 허탈해지는 것이죠. 보상 과정에서도 유가족이 ‘내가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적 질병이 부른 혼란



김 교수는 유가족에게 쏟아지는 말과 시선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물신화(物神化)’됐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돈 많이 받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것 아니냐’ ‘일단 보상을 받으면 분노가 가라앉을 것이다’라는 식의 말이 들려올 때였다. 선체 인양을 마치 선물 주듯 이야기하는 정부의 태도도 실망스러웠다.

“돈을 주면 가족들이 힘이 약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관료가 있다면 그 자신이 바로 돈의 노예입니다. 중요한 건 자식을 억울하게 잃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덜 힘들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돈이 아니에요.”

세월호 참사는 유가족에게 큰 고통을 안겼지만 동시에 사회 전체에도 위기의식을 안겼다고 김 교수는 분석한다. 첫째 국가의 구조 능력이 매우 믿기 힘들다는 것, 둘째 안전은 각자 개인이 챙겨야 한다는 것, 셋째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사회적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국민 스스로도 믿었던 정부의 무능력에 상처를 입었다.

“세월호 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사람도 ‘아 이런 일이 있을 때는 이런 흐름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공적 체계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 따른 집단적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죠.”



'동행'을 통한 사회적 치유



박 교수는 “앞으로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피해자들과 슬픔, 고통을 함께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보상,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 등 정치적·감정적인 이야기보다 이들이 ‘세월호 유가족’이란 낙인 없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동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 교수도 치유는 ‘사회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유가족과 사회가 함께 회복돼야지 어느 한쪽만 회복돼서는 진정한 치유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는 “유가족이 개인적으로 힘든 과정을 거쳐 치료가 됐다고 칩시다. 사회에 나갔는데 사람들이 ‘돈 때문에 마음이 나아진 것 아니냐’고 하면 그는 엄청난 모멸감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다시 트라우마가 될 것이고요. 심리학자 카이 에릭슨은 ‘집단의 회복 없이 개인의 회복은 어렵다’고 했어요.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려면 사회적 배경이 함께 달라져야 합니다.”

문수정 전수민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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