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특별한 여인, 송자씨 미스터 몽키씨의 선악과에 넘어갔대요

입력 2015-04-18 02:50
‘딸바보 아빠’ 존 거브란트 선교사(오른쪽)와 ‘특별한 엄마’ 이송자씨. 흑인으로 오해 받는 엄마는 한국인이다. 캐나다 출신 아빠는 38년째 한국서 살고 있는 이웃 아저씨이다. 부부가 경기도 평택 안중교회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평택=허란 인턴기자
1979년 평택 선교회 본부에서 치러진 결혼식(위)과 ‘가슴으로 낳은 딸’ 수산나와 사위 이찬희씨 결혼 사진.
가족 여행 사진. 왼쪽부터 존 거브란트 선교사의 사위 이찬희씨, 딸 수산나, 쌍둥이 손자, 아내 이송자씨.
특별한 외모의 엄마에게 한 번도 싫은 기색 않고 자란 딸 수산나의 초등학교 시절.
존 거브란트(61·선교사)

캐나다 매니토바주 모던시 출신의 백인. 1977년 4월 28일 하나님 명령에 따라 한국 선교를 위해 입국했다. 우리 나이 스물넷 때였다. 자상한 성격. 충직한 종이다. 1년 선교 목적이었으나 38년째 첫 선교지 경기도 평택에서 살고 있다. 79년 울산 출신의 ‘특별한 여인’을 사랑해 두 번 고민도 않고 청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딸 하나. 대한민국 대표적 ‘딸 바보’ 아빠. 지금은 평택 안중교회를 섬긴다.

이송자(60·간호조무사)

거브란트의 아내. 우리 나이 예순에 간호조무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평택시 안중읍 요양병원서 근무한다. 억척 아내이자 엄마. 울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서 컸다. 한데 몸 전체가 ‘특별하다’. 토종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흑인과 같은 신체를 지녔다. 여러 형제 중 형제 둘만 그렇다. 그렇다고 흑인은 아니다. 유전적 요인인 듯한데 그 이유는 모른다. 자라면서 상처가 많았다. 지금도 “한국말을 참 잘하시네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외국인 노동자로 오해받는 것이다.

수산나(33)

부부의 ‘엄친딸’. 생후 병원에 버려진 신생아였다. 그 신생아를 부부가 ‘가슴으로 낳아’ 호적에 입적시켜 친딸이 됐다. 백인 아빠, 흑인 같은 엄마를 둔 특별한 아이였다. 그렇지만 한 번도 ‘특별한 엄마’를 창피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딸바보’ 아빠 덕에 매니토바로 유학, 대학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했다. 2남1녀를 두었다.

이찬희(33·공군 전투기 조종사)

F-15 전투기를 조종하는 준수한 대한민국 군인. 반듯한 신앙인으로 자라 교회 장로의 소개로 수산나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백인 장인, ‘특별한 장모’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를 지녔다. 결혼식 후 장인·장모, 친부모, 친할머니와 그 친구 등 6명과 함께 제주도 신혼여행을 즐겼다. 충북 청주 근무 시 장인 사역지 안중교회까지 먼 길 마다 않고 섬겼다. 지금은 대구 근무.

‘가족의 탄생’.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시115:13∼14)라고 했는데 바로 이 가족에게 한치의 부족함도 없는 말씀 같습니다.

부부와 그 딸은 어떤 혈연관계도 없습니다. 부부는 도무지 세상적 생각으로 맺어질 수 없는 곳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전 9:9)라며 은혜의 유업을 주셨죠. 두 사람이 일평생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겠지요.

그 부부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겨울왕국’과 같은 캐나다 모던시에서 태어난 거브란트. 모태신앙으로 하나님 안에서 잘 성장했습니다. 목장주의 세 아들 중 장남이었죠. 한데 그가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캐슬리나 거브란트(82)는 남편을 잃고 아들을 많이 의지했죠. 거브란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건축 기술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가업을 이어야 했죠. 한데 거브란트는 “무엇을 하건 마음의 편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한국 평택, 경남 거창 등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윌버 맥카피(1917∼2010·관련기사 19면) 선교사가 그의 고향 교회에서 선교보고대회를 가졌습니다. 76년이었죠. 거브란트는 이때까지 한국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기도 끝에 맥카피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마흔 셋의 어머니를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 미국 미네소타, 시애틀, 일본 도쿄를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이 이듬해입니다. “주님이 부르는데 어떻게 막느냐”가 어머니의 울음 섞인 허락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들어와 사역에 나선 곳이 당시 평택군 진위면 동촌리 소위 사후동입니다. 지금의 성은동산기도원 자리죠. 그곳은 맥카피 선교사 등이 60, 70년대 가난한 한국과 그 나라 백성을 위해 일군 ‘은혜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기독교선교회’란 명칭으로 경기 남부 복음화에 힘썼습니다. 오산기독병원, 용인 남사중학교 등이 그 선교회에 의해 설립됐습니다. 박정희정부의 인가를 받은 선교회였던지라 전두환 독재정권 집권 후에도 타 선교회와 달리 탄압을 피할 수 있었죠.

거브란트가 아내를 만난 것은 선교회에서였습니다.

이 부부를 지난 13일 안중교회에서 만났습니다. 거브란트는 ‘동네 아저씨’ 같은 유창한 한국말로 첫 설렘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긴 생머리에 약해요. 긴 머리를 가진 아내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떨렸죠”라고 합니다. 60대 부부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네요.

아내 이송자씨는 특별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흑인 병사와 한국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이 아닌가 싶죠. 다들 오해합니다. 그녀는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는 이의 소개로 선교회에서 일했습니다. 생활교사였다고 할까요. 선교회 일이라는 게 닥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굴러가질 않죠. 30∼50명의 결핵 환자를 낫게 하고 보살피는 게 주된 일이었죠.

건축학을 공부한 거브란트는 눈뜨면 못과 망치를 챙겨 선교회 부속건물 건축에 나섰습니다. “헬로 미스터 몽키”(당시 유행하던 팝송 한 소절) “잉글리시 캄캄(어둡다=모른다)”. 당시 그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이송자씨는 그 많은 식구 먹이느라 오산·평택 시내 장을 다니기 바빴습니다. 가끔 둘이 시장을 다녀오기도 했죠. 동료로 말이죠.

한데 거브란트가 대구 선교 집회에 다녀오다 그 유명한 김천 사과를 한 노점상 할머니에게 샀습니다. 큰 사과 딱 한 개였죠. “내 평생 그렇게 큰 사과는 그때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그는 ‘긴 생머리 아가씨’에게 사과를 건넸습니다. 특별한 외모 때문에 사랑받아보지 못한 송자씨. 어땠을까요? 그 마음이….

지금의 송자씨. 입을 한 참 후에 뗍니다. “주님 안에서 생활하는 그는 내 인생을 맡겨도 될 만큼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며 거브란트가 농담합니다. “제가 준 선악과에 넘어갔다고 생각해요.” 부부는 활짝 웃습니다. 79년 6월 그들은 결혼했습니다. 시어머니와 시이모도 참석하셨지요.

부부는 결혼 후 선교부 방 한 칸에서 살며 복음을 전합니다. 1년 작정하고 왔던 거브란트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8년째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임신을 거부합니다. “나 닮은 아이를 낳을까 두려웠다”고 합니다. 부부는 가슴으로 아이를 낳자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수산나가 태어납니다. 거브란트는 동역자 아내와 평택교회, 평택서부교회 등을 섬겼습니다. 미션스쿨 한광여고와 여중, 은혜여중 등에서 영어교사 생활도 했습니다.

수산나는 가난한 목회자의 엄친딸로 자랍니다. 속 깊은 수산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친부모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죠. 유학 중에도 속 한 번 썩인 일 없는 수산나입니다. 그 딸이 어렸을 때 유일한 불만은 엄마, 아빠를 독차지 못하고 늘 교회 식구들과 함께하는데 따른 투정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나눔과 교제가 부부에게 일상이었으니까요.

수산나는 시집 가 쌍둥이 아들에 이어 최근 딸을 낳았어요. 백인 아빠는 똘똘하고 예쁘게 자라준 수산나가 지금도 애인 양 예뻐 죽습니다. 부부의 사택은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손녀 사진 전시장 같습니다. 양 부모 모시고 신혼여행을 가는 딸 부부이니 말해 뭐하겠어요.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입니다.

송자씨는 사위 찬희씨가 아들 같습니다. 5년 전 부부는 안중에 교회를 개척한 후 교회 건축에 따른 대출금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송자씨는 평택시내 요양병원서 요양보호사 일을 했습니다. 버스 갈아타며 1시간30분 이상 매일 출근해야 했죠.

그러던 어느 주일. 딸 내외 차와 깜찍한 경차 한 대가 교회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장모를 반갑게 포옹한 사위가 말합니다.

“어머님, 앞으로 이 차 타고 출근하세요. 어머니 차입니다.”

훤칠한 대한민국 F-15 전투기 조종사, ‘전투기보다 비싼’ 경차를 장모에게 선물했네요.

신앙 안에서 자란 딸과 사위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엡 6:4)하는 2남1녀의 부모가 됐습니다.

‘특별한 여인’은 이제 “작은 걸 해도 늘 자상한 남편”과 36년째 살며 복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흠 없는 남편이자 ‘딸바보 아빠’는 평범한 한국의 가장이 됐어요. 부부는 손자들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교회 사택 창문 너머 동리 입구를 바라봅니다.

요즘 부부는 동네 유명한 ‘옛날 짜장’집에서 교인 및 이웃을 초대해 ‘짜장면 선교’를 하곤 합니다. 짜장면 먹고 힘을 내 전도하는 거죠. 5년 전 개척한 교회에는 40여명이 출석합니다.

가족은 그렇게 탄생하여 후대를 잇고 있습니다. 그 후대는 그 부모가 그랬듯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딸바보 아빠, 특별한 엄마를 수산나가 기도로 응원하고 있네요.

평택=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