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一點이 말씀되고 一劃에 교회서다… 노전 묵창선 화백

입력 2015-04-18 02:56
북종화 대가이자 강진군 명인으로 선정된 묵창선 화백이 자신의 화실에서 대형산수화를 그리고 있다.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그의 작품은 그동안 국내외에서 큰 호평을 받으며 80여 차례 전시됐다.
묵 화백이 아내 조은심 권사와 겨울의 산풍경 작품을 들어보며 설명하고 있다.
아주 섬세한 붓놀림이 요구되는 묵 화백의 작품 맹호도.
지난 15일 전남 강진군 작천면 퇴동마을 53번지. 길이 끝나는 나지막한 동산 언저리엔 연분홍 진달래꽃이 활짝 피었다. 꼬불꼬불 밭길을 건너 노전미술관 간판이 걸린 붉은 벽돌집 2층에 들어서자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곳은 노전(蘆田) 묵창선(74) 화백, 북종화(北宗畵)의 대가로 불리며 전남 강진군 명인(名人)으로 지정된 그의 작업실이다. 20평 남짓한 공간에 다양한 동양화와 서예, 도자기 등 수천점의 작품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진지하게 작품을 그리는 묵 화백의 붓놀림이 무척이나 빠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왼손 오른손으로 산수화 2점을 동시에 그리고 있다. 화선지에 묵을 입혀 왼쪽 그림을 왼손으로 그리고 이것이 마르길 기다리는 동안 오른손으로 오른쪽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순식간에 화려한 산수화 2점이 완성됐다.

북종화는 외면적 형사(形似)에 치중,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공필화(工筆畵) 계통의 그림을 일컫는다. 묵 화백이 그린 호랑이 그림의 경우 수염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정교해 금방이라도 화선지를 뚫고 나올 기세다.

“저는 다작(多作)형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달란트를 주셨어요. 이 나이가 되도록 평생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러니 제가 제일 잘하는 것도 그림이고 제일 좋아하는 것도 그림입니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도 싫증이 나지 않아요.”

호탕하게 웃는 목소리가 푸근하다. 인천에서 주로 살았던 묵 화백은 이곳 작천면에 17년 전에 내려왔다. 아내 조은심(70) 권사의 고향인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에만 전념해 보자는 의도였다. 예향 호남 예술인들과 폭넓게 교제하고픈 욕심도 있었다.

“13세 때 제가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그때 시골에서는 꽃가마와 상여 등을 화려하게 색칠했는데 이것을 구경하다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지요. 난생 처음 잡은 붓인데 큰 칭찬을 받았어요. 이때부터 그림을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묵 화백은 광복 후 혈혈단신 남하해 연고가 없었다. 유명한 동양화가들의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따라 그렸다. 그런데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려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아내 조 권사만이 그가 그림에만 전념하도록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아내가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남편이 그림에 빠져 생활이 안 되니 직업전선에 나갔지요. 화장품 외판부터 보험회사 외판원, 떡 장사, 생선 장사 등 안 해 본 것이 없어요. 1남 3녀를 모두 잘 키운 것은 모두 아내 덕분입니다.”

무명에다 인맥이 전혀 없던 묵 화백은 팔리지 않는 그림이지만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다 화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서예가 창해 김창환 선생으로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고 용기를 얻은 후 유명한 노당 이성우 선생 등 여러 동양화가들로부터 사사하고 나서였다. 한국인보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먼저 그의 그림을 알아보고 사 가곤 했다.

묵 화백은 공군에 입대해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후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깊은 신앙을 유지해 왔다.

“지금 생각해도 사실 작품생활보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감사했어요. 부족하고 힘든 일이 많아도 주님이 주신 사랑을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묵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아끼지 않고 필요로 하는 곳에 나누곤 했다. 그러던 그가 작가로 우뚝 서게 된 계기가 있었다. 한 정당에서 후원전시회를 하는데 도와 달라고 해 기꺼이 그림을 기증, 전시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전시회가 묵 화백의 그림값과 지명도를 크게 올려놓는 효자노릇을 해 주었다.

정계 재계 등의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들이 이 전시회에 찾아오고 묵 화백의 수준 있는 그림에 모두 만족하면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묵 화백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라고 해석한다.

묵 화백의 이력은 무척 화려하다. 대한민국 종합미술대전에서 특선과 한국문화대상의 대상을 받는 등 수많은 수상경력과 함께 지금까지 개인 전시회만 40여회를 열었다. 이밖에 각종 초대전 참여와 선교기금 및 교회 건축비 마련을 위해 전시회를 열어 준 것은 부지기수다. 미국과 호주, 중국, 일본, 필리핀, 대만, 캐나다, 독일 등 해외 전시회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그림은 눈으로 보지만 잘된 그림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그림입니다. 보는 사람이 그림 속에 잠시나마 빠져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묵 화백은 “동양화는 색을 넣지 않고 먹 하나만 가지고도 사계절을 다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며 “화백 소리를 들으려면 최소 농묵, 흑묵, 중묵, 담묵, 비묵 등 5가지 색을 자유자재로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남도 및 강진지역 문하생을 배출하고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160여명을 제자로 가르친 것 같아요. 제가 즐겨 그리는 북종화 외에도 남종화, 문인화, 화조도, 풍속화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소화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묵 화백의 작품은 고가임에도 교회와 선교를 위한 전시회에는 작품비를 전혀 받지 않고 아낌없이 그림을 제공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한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 또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회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이를 주최 측에 모두 기증한다. 이렇게 도움을 준 교회와 신학교, 사회복지기관이 수없이 많다. 특히 척수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매년 판매용 크리스마스카드를 대량으로 그려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여 왔다. 다문화 가정과 노인, 불우청소년을 위해 작품을 희사하고 있다.

작천중앙교회 장로로 봉직하며 목포극동방송 강진운영위원장을 맡는 등 다양한 교계일도 하고 있는 묵 화백은 자녀들이 모두 제 몫을 해 잘 살고 있고 특히 아들(묵재광 목사)이 목회자가 된 것이 무엇보다 흐뭇하다. 지난해 12월에는 그동안 기독교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계복음화협의회가 주는 ‘자랑스러운 문화예술인상’을 받기도 했다.

관공서나 학교, 교회 등에서 자신의 작품이 걸려 있는 것을 볼 때 작가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는 묵 화백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작품을 계속 그릴 생각이다. 그래서 이 작품들을 통해 선교와 교회 건축, 이웃 돕기에 도움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길 희망했다.

강진=글·사진 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