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년, 갈등을 넘어 치유로] 잊지 말아야… 그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입력 2015-04-16 02:01 수정 2015-04-16 09:47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서거차도와 맹골군도를 통과하는 바닷길 ‘맹골수도’에서 침몰했다. 오전 8시48분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배는 1시간29분 만에 완전 전복됐다. 이때 기울기가 108도였다. 불법 증축, 과적, 평형수 조작, 고박 부실 등 위험천만한 조건을 모두 갖춘 배는 급격한 항로 변경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참사의 직접 원인은 아니다. 선장과 선원, 해경 등이 필사적으로 승객 구조에 나섰다면 ‘전복 사고’로만 기록됐을지 모른다.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이 단원고 2학년 최덕하(17)군으로부터 구조요청을 받은 건 배가 뒤집힌 지 4분 만인 오전 8시52분이었다. 전화를 넘겨받은 목포해경은 최군에게 “경도와 위도를 말해 달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답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질문은 반복됐다. 1등항해사는 최군보다 늦게 제주VTS(해상교통관제센터)에 신고했다.
이준석 선장은 “구명조끼를 입고 선내에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객실 승무원은 그대로 방송했고 승객 대부분이 따랐다. 기관부 선원들은 3층 선실에 집결했지만 승객 대피를 논의하지 않았다. 해경이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옆 복도의 부상당한 조리원 2명도 방치했다.
교신 내용은 이들의 자격을 의심하게 만든다. 항해사는 오전 9시8분 진도VTS에 “움직이지 못한다. 어떻게 할까? 바다에 빠져야, 어째야 될지 모르겠네”라며 우왕좌왕했다. 진도VTS 측에서 “승객들에게 구명동의를 착용하도록 하라”고 하자 “방송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이 선장은 승객 대피명령을 내려 달라는 객실 매니저들의 요청도 묵살했다. 매니저 중 한 명인 박지영씨는 마지막까지 승객들을 돕다 숨졌다. 기관부 선원들은 오전 9시39분 해경 구조선이 도착하자 맨 먼저 탈출했다. 모두 신분을 숨겼고 이 선장은 속옷 바람이었다.
안전행정부 상황실은 현장상황을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장에게 문자메시지로 알렸다. 최군이 119에 신고한 지 39분 뒤였다. 오전 9시33분 세월호 인근에 도착한 해경 소형 연안경비정 ‘123정’은 선체 주변만 맴돌았다. 해경 헬기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오전 9시47분 3층 난간이, 3분 뒤 4층 난간이 완전 침수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전 10시15분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세월호는 2분 뒤 완전히 뒤집혔다. 선수 일부만 수면 위에 남았을 때에서야 해경 특공대와 잠수요원, 해군 해난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해난구조대는 잠수장비를 휴대하지 않아 이날 저녁까지 구조작업에 참여하지 못했다.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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