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정종성] 4월은 잔인한 달

입력 2015-04-15 02:09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어나게 하고 추억과 정욕을 뒤섞어 버리며 잠든 뿌리를 봄비로 뒤흔든다. 겨울이 차라리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나니 대지를 망각의 눈(雪)으로 덮고 마른 뿌리를 통해 작은 생명을 먹여주었다.’(T S 엘리엇의 ‘황무지’ 중)

의식의 흐름을 따라 불연속적인 수사(修辭)의 전환과 대조적인 문체 때문에 매우 어렵게 읽히는 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생명의 기운을 상실한 유럽의 정신적 혼미와 황폐한 상황을 ‘황무지’라는 자화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현대문명의 비인간성과 메마름, 믿음의 부재와 변질된 성(性), 그리고 재생이 거부된 죽음에 대하여 섬뜩한 이미지와 다음성적인 리듬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시인은 고통스런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인간은 신의 축복인 문명을 왜 이렇게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는가.’

시인의 예언자적 고통과 좌절은 로마의 작가 페트로니우스의 소설 ‘사티리콘’에서 인용한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묘비명 서문을 통해 이미 강렬하게 표출됐다. “나는 쿠마에의 무녀(巫女)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무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죽고 싶어!’”

시빌(Sibyl)이라는 이탈리아 무녀는 아폴로에게 총애를 입어 ‘한 움큼의 먼지만큼이나 긴 인생’ 즉, 영생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그러나 시빌은 젊음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늙어가면서 몸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급기야 작은 항아리 속에 던져진 뒤 추녀 끝에 매달려 살게 되면서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자 무녀는 “제발 죽게 해 달라”고 울부짖는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항아리 속의 무녀와 현대인을 동일시한다. 황무지에서 죽음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문명의 ‘막장’을 처절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현대인의 삶에 서린 ‘무한한 늙음’과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절망을 통곡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지난해 4월은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과 일반 승객들을 태우고 전남 진도 앞바다를 지나던 세월호의 침몰 과정을 전 국민이 지켜본 통곡의 달이었다. 304명의 사망·실종자를 내면서 한국사회를 충격과 좌절에 빠지게 한 세월호 참사는 벌써 1주기가 되었지만, 우리 사회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면서 다시 잔인한 4월을 맞고 있다.

세월호 침몰은 현재진행형이다. 정부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의 예산과 인력을 축소하는 시행령을 발표하고 배·보상안을 제시함으로써 4월이 더욱 잔인하다.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해 부활이 없는 부활의 계절이 너무 잔인하다. 부활의 관심이나 열정, 혹은 환상도 없으면서 통과의례적인 표어만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해 40일간 단식했던 고 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이달 초 쿠마에의 시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정부의 시행령은 2014년 4월 16일로 시간을 되돌리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다시 침몰하고 있습니다.”

김씨와 유가족들은 지금의 한국사회가 ‘생명이 더 이상 깃들 수 없는’ 황무지임을 고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동시에 희생자들의 죽음이 황폐한 이 나라를 일깨우는 천둥소리와 소나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하는 것은 지난 1년간 ‘자신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그 죽음의 의미를 마주하지 못한 정부의 가벼움과 정신적 황폐함이 아닐까. 그래서 한국사회의 4월은 가장 잔인하다.

정종성 교수(백석대 기독교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