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의외의 대답을 듣게 된다. 이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 그것은 ‘마음껏 슬퍼하는 일’이다. 침몰한 배는 아직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배를 물 밖으로 끌어내 왜 이런 참사가 벌어지게 된 건지, 어쩌다 304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하지 못한 건지 그 물음에 답을 찾기 전까지 누구도 슬픔에 집중할 수 없다.
치유는 진실을 마주한 뒤 깊숙한 곳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직면’의 문제라고 말한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치료하려면 직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직면할 진실이 짙은 안갯속에 있는 한 치유의 길로 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1년을 지나오며 상처에 또 상처가 덧입혀졌다.
봄을 마주하기 두려운 사람들
잠에서 깨어나는 게 싫은 날들이 있었다.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온몸의 세포가 바짝 곤두선 하루를 보내고 밤이면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밤마다 깊은 잠 속으로 도망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잠으로의 도피는 번번이 실패했다.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힘겹게 눈을 뜨면 보이는 건 높은 체육관 천장이었다. 곧이어 누군가의 울음소리, 한숨과 짜증, 다급한 발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공간을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다.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가족을 잃은 수백, 수천명과 뒤엉켜 지냈던 지난해 4월은 그랬다.
아들 이재욱군을 잃은 홍영미씨는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던 것 같다고 했다. 지금 홍씨는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1년 전에는 아침을 맞는 게 힘겨웠다면 지금은 밤이 오는 게 무섭다. 새벽 3, 4시가 되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는 밤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어떻게 잠이 오겠어요.” 불면은 홍씨만 겪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족은 1년이 다 되도록 잠의 평안을 빼앗겼다.
불면은 병을 부른다. 잠을 제대로 못자면 치아가 상한다는 걸 알게 됐다. 시력도 나빠졌다. 안경을 꼈던 사람들은 1년 동안 두세 번씩 안경을 바꿔야 했다. 혈액순환이 안 됐다. 갑자기 살찌는 사람도 있고 너무 살이 빠지는 사람도 생겼다. 누구는 혈압약을 먹게 됐고, 누구는 우울증약을 먹고 있다. 아버지들은 술을 많이 마시는 날이 늘었다.
뭘 먹어도 맛이 없다. 명치 부근이 늘 답답하다. 억지로 뜨는 한 술은 소화가 잘 안 된다. 운동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쉽지 않다. 홍씨는 이렇게 말했다. “4월 16일엔 아이들이 죽었고, 1년 동안 부모들이 죽었어요. 상처에 계속 소금을 뿌려대요….”
겨울엔 좀 나았다. 추워서 외부 활동을 잘 못하다보니 안산트라우마센터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운영한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어머니들은 함께 뜨개질을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치유 공동체’를 만들어갔다.
홍씨는 지금 밖에 나가는 게 싫다고 했다. 봄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다. 웬만큼 잘 견디는 사람 중 하나라고 자신했는데도 그렇다. “봄이 오니까 겨울을 지나면서 묻어두려 했던 마음이 새로 나오는 거예요. 형 누나 동생을 잃은 아이들도 심해요. 그때 그 상황, 그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나니까.”
5시간을 함께 걸어도 꺼내기 힘든 마음
슬픔을 들어줄 준비를 단단히 하고 떠난 길이었다. 한창우 안산트라우마센터장은 지난 2월 6일 세월호 참사로 막내딸을 잃은 A씨와 함께 전북 정읍을 걸었다. 피해 가족들은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경기도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전남 진도 팽목항 분향소까지 19박20일간 약 450㎞ 릴레이 도보행진을 했다. 한 센터장과 A씨는 11일째 행진을 맡았다.
두 사람은 이날 처음 만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었다. 점심시간에는 나란히 앉아 김치찌개를 나눠 먹었다. 그렇게 4시간을 함께하면서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한 센터장은 A씨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걷는 것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5시간쯤 지났을 때 A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사고 후 생업에 복귀했다고 했다. 남은 가족을 위해서였다. 몸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일하는 도중 느닷없이 가슴이 턱 막혀 주저앉을 때가 많다고 했다.
슬픔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고 했다. 밤은 더 힘들었다. 막내딸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끔 ‘이제 1년쯤 지났으니 조금씩 잊어야지.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면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마음에 차올랐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센터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그조차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헤어질 때 A씨는 한 센터장의 손을 꼭 잡고 “조심해서 가라”고 했다. 고마움이 느껴졌다.
한 센터장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에게 대단한 치료법이나 프로그램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함께 있어줄 사람, 자신의 억울함과 상처를 들어줄 사람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아물지 않는 아픔
아들을 잃은 홍씨도, 막내딸을 잃은 A씨도 1년 동안 회복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 또 상처가 생겼다. 평생 잊혀지지 않는 아픔을 부여안고 있는 이들에게 피로감을 들먹이며 ‘이제 그만하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도 전에 또 다른 트라우마가 덮쳤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었고, 마음껏 슬퍼하기 전에 분노가 일었다. 이어진 감정은 불신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고 물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고 피해자라면 누구나 하는 이 질문에 대해 급기야 ‘대체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되묻는 분위기마저 만들어졌다.
상처가 나을 수 없는 상황은 1년간 계속되고 있다. 한 센터장은 이렇게 비유했다. “교통사고가 나면 제일 먼저 다친 데 없나 확인하고, 경찰 부르고, 보험사 직원 부르고, 견적을 냅니다. 차는 도로 밖으로 빼내죠.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일련의 과정 중에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 마음의 상처를 돌볼 여력이 없는 거죠.”
불신과 상처는 유족들만 겪는 감정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 일련의 사건을 국민 모두가 목격하면서 상처를 받았다.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현수 교수는 “많은 이들의 뇌리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나도 이렇게 억울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박힌 사건이다. 희생자, 유족은 물론 국민의 신뢰를 잃은 국가까지 모두가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안산=문수정 박세환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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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15 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