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많은 이들의 안전불감증이 빚은 인재(人災)라는 건 분명했다. 여기저기서 공공시설 전반을 점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고양종합터미널, 전남 노인요양원, 의정부 아파트, 강화도 캠핑장 등 곳곳에서 안전불감증 때문에 사고가 터졌고 또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세월호의 교훈’을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안전의식은 ‘그날’ 이전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국민일보는 세월호 참사 1년을 맞아 주요 재난 취약 시설을 둘러봤다. 자성(自省)은 한때였다. 억울한 죽음들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모습만 펼쳐졌다.
◇참사 잊은 인천항=지난 8일 오전 7시, 백령도행 배를 타러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1년 전 이맘때 앳된 얼굴의 열일곱 살 아이들이 이곳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세월호에 올랐었다. 항구는 부대로 복귀하는 해병대원, 생필품을 이고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섬 주민들,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참사 이후 한동안 굳게 닫혀 있던 터미널 2층 청해진해운 사무실은 다른 선사(船社)가 쓰고 있었다.
지난해 6월 정부는 여객선의 신분 확인 절차를 대폭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발권부터 탑승까지 3단계 확인 절차가 생겼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어느새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섬에서 돌아오는 길, 신분 확인은 매표소에서만 이뤄졌다. 직원은 신분증 사진과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 표를 내줬다. 이후 개표구를 지나 배에 오를 때까지 신분증 검사는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밀항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개표구로 들어가기 전 승선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선사 측은 알 방법이 없다.
정기점검 행태도 참사 직후와는 확연히 달랐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이 지난해 4월 30일 노후 선박 17척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전점검에선 화재 상황을 가정했었다. 직원들은 방호복을 입고 뛰어다녔다. 항만청 직원들도 손에 기름때를 묻혀 가며 선박 곳곳을 꼼꼼하게 돌았다.
지난 6일에도 20년 이상 된 노후 선박 16척에 대한 안전점검이 이뤄졌다. 나흘간 발견된 지적사항은 ‘객실 내 사다리에 승객 짐이 놓여 있다’ 등 표면적인 것뿐이었다. 정작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선원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얼마나 잘 훈련돼 있는지 등은 점검하지 않았다. 항만청의 여객선 안전점검 담당자는 “선원들이 비상상황 대처 훈련을 잘 하는지 평가하는 것은 선원들의 근무 의욕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휠체어 통로 없는 노인요양원=지난해 5월 전남 장성 노인요양원에서 난 불은 2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고 직후 보건복지부는 부랴부랴 노인요양시설 현장 점검을 벌였다. 그리고 11개월이 지났다. 달라졌을까.
지난 12일 서울 은평구의 한 노인요양원을 찾았다. ‘최고의 품격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최고급 시설’이라고 광고하는 곳이다. 노인 18명이 매달 62만∼70만원을 내고 살고 있었다. 대부분 누워 지내는 환자다.
이 건물에는 휠체어 전용 통로가 없다. 휠체어 한 대가 들어가면 꽉 차는 승강기와 계단이 전부다. 건물 5층의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유리문은 높이 2m의 양문 개방형이다. 그런데 한쪽이 잠겨 있었다. 나머지 문은 휠체어 한 대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는 수준이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누군가 손을 뻗어 유리문 위의 잠금장치를 풀어야 한다.
승강기를 타고 1층까지 내려왔다 다시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은 14초였다. 18명을 모두 옮기려면 승강기에서만 4분12초가 걸린다. 화재 때 승강기 이용은 더 큰 피해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불이 났을 때 생존을 결정하는 골든타임은 5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혼자 거동하기 힘든 노인들이 유리문을 빠져나와 승강기 앞까지 온다 해도 사실상 탈출할 방법은 없는 셈이다.
이날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키가 150㎝ 남짓한 60대 여자 직원 1명뿐이었다. 그는 “주말이라 혼자 일한다”고 말했다.
◇200평 캠핑장엔 먼지 쌓인 소화기 1대뿐=지난달 22일 강화도 캠핑장에서 불이 나 5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다. 국민안전처는 지난 6일부터 나흘간 야영장 현장 실태 진단에 나섰다. 서울시는 급히 야영장 안전관리 대책을 내놓았다. 텐트별 전기 사용량을 1㎾ 이하로 제한하고 사용량이 초과될 때는 전원이 자동 차단되는 시설을 설치토록 했다.
지난 10일 경기도 양평의 한 캠핑장을 찾았다. 국도를 빠져나와 비포장도로 산길을 따라 10여분 달렸다. 소방차는 고사하고 일반 승용차가 올라오기도 힘들 만큼 좁고 험한 길이었다. 200평 들판에 인디언텐트 2동과 몽골텐트 4동이 설치돼 있었다. 지붕으로 갈수록 뾰족하게 좁아지는 원뿔 모양의 이 텐트들은 안에서 불이 나면 불길이 밖으로 퍼지지 않고 천막 안에서 돌며 모든 걸 태운다. 지난달 사고가 난 야영장 텐트도 이런 거였다.
소화기가 있는 텐트는 1동뿐이었다. 먼지가 쌓여 오랫동안 손대지 않은 티가 났다. 텐트 안 콘센트에는 전기장판과 난로, 밥솥, 정수기, 냉장고, 커피포트가 빼곡히 꽂혀 있었지만 전력 차단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캠핑장 뒤로는 너른 산비탈이 둘러싸고 있었다. 산비탈에는 어른 머리만한 돌이 널려 있었지만 산사태 방지 구조물도 없었다. “강화도 캠핑장 사고 이후 특별히 안전에 신경을 썼다”는 관리자의 말이 무색했다.
양평 일대 캠핑장 3곳은 모두 강화도 캠핑장 화재 때 문제가 된 전기장판을 기본 난방 도구로 쓰고 있었다. LP가스통을 아무렇게나 방치해두거나 텐트들을 1m도 채 안 되게 다닥다닥 붙여놓기도 했다.
정부경 기자, 양평=전수민 기자
인천=양민철 기자 vick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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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14 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