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참사 후 원인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책임 문제를 먼저 거론하는 것은 과거 정부에서도 ‘매뉴얼’처럼 해온 일이다. 여론을 의식한 정치행위였다. 재발 방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런 대응방식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왜 옷부터 벗나=정홍원 전 국무총리는 세월호 참사 11일 뒤인 지난해 4월 27일 사의를 표명했다.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총리 후보 2명의 잇단 낙마로 지난 2월이 돼서야 퇴임했다. 이후 진행 상황을 보면 그의 진퇴가 사고 수습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대형 사고 뒤 고위 공직자가 옷을 벗는 관행은 일종의 공식이다. 1993년 서해훼리호 참사 때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교통부 장관과 해운항만청장을 경질했다. 사고 8일 만이었다. 이듬해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때는 임명직이던 서울시장이 다음날 전격 경질됐다.
전문가들은 “고위 공직자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정부로서는 사태를 모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스템 안에서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라며 “근본 원인을 드러내 ‘외부화’하고 진지한 토론을 하는 게 더 중요한데 세월호 참사는 이런 학습능력이 없는 우리의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책임자 문책 관행은 해방 이후 고속·압축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뿌리를 내렸다. 성장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크고 작은 사고는 빨리 해결해야 했다. 고위 공직자 사퇴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여론을 환기시킬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대형사고 뒤 공직사회 기강을 잡겠다고 대통령이 으름장을 놓는 것도 판박이처럼 되풀이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성수대교 참사 이후 담화에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공무원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엄단하겠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후 첫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한 말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검찰과 경찰이 사고 조사·수사를 맡는 것도 문책 위주의 수습 관행이 정착하는 데 기여했다. 검·경 수사는 대개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구조적 원인과 재발방지책은 다뤄지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민관이 사고 초기부터 함께 조사하는 전통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 정치화된 배경은=대형 참사를 둘러싼 책임 추궁의 문제는 정치적 갈등으로 번지기 쉽다. 정치·사회학자들은 이를 ‘정치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 정부의 행정 시스템에 책임을 묻는 것은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성공하기 어렵다. 권력을 가진 집권당이 다양한 방법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책임을 피하려는 집권세력과 이를 추궁하려는 반대세력의 갈등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이런 갈등이 사회 전체로 확산됐을 때 정치권이 이를 다루는 모습이다. 갈등을 봉합하기보다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는 게 현실 정치다. 김강민 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 교수는 “국내 정치인들은 ‘학습화’를 통해 이미 공공갈등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할 줄 안다”면서 “모든 갈등이 정치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했다.
세월호 참사도 정치화되면서 갈등과 분열이 확산됐다. 정부는 구원파, 공직사회 등 사고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곳에 표적을 만들었다. 세월호 유가족을 바라보는 여론의 시선이 갈라졌을 때도 여야는 통합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정치권에서 갈등 프레임을 조장했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정치 과잉’ 문제가 해소돼야 향후 비슷한 상황에서 사회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도한 이념적 접근을 삼가야 한다”고 말했고, 김강민 교수도 “정치인이 사회적 이슈에 개입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또 정부의 재난 대응 프로세스를 다시 짤 필요도 있다고 충고한다. 사고원인 조사부터 철저하게 한 뒤 시스템을 고치고 책임을 묻자는 얘기다. 이재은 충북대 행정학과 교수(전 국가위기관리학회장)는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정부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어서 책임을 떠넘기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만 궁극적으로 세월호 같은 참사를 막는 길”이라고 말했다.
권기석 박세환 기자
keys@kmib.co.kr
[세월호 1년, 갈등을 넘어 치유로] ‘대형사고→옷 벗기’ 관행… 재발 방지 논의가 우선
입력 2015-04-13 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