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년을 맞는 한국은 여러 조각으로 분열돼 있다. 뜻하지 않은 대형 재난이 그 사회를 오히려 뭉치게 한다는 역사의 교훈은 우리를 비켜갔다. 여야는 정쟁 끝에 참사가 일어난 지 7개월이 다 돼서야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어렵게 만들어진 특별조사위원회는 정원 축소 논란 속에 활동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천막 농성을 이어가는 세월호 유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은 제각각이다. 철저한 진상조사로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이제는 적절한 보상으로 마무리할 때라는 목소리도 공존하고 있다. 이런 의견 차이는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다툼과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왜 분열했을까. 292명의 생명을 앗아간 1993년 서해훼리호 참사 때는 이런 갈라짐이 없었다. 192명이 사망한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도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대형 재난 후 1년이 지나도록 첨예한 갈등이 지속되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국민일보는 여러 전문가에게 이 분열과 갈등의 ‘뿌리’를 물었다. 공통된 답변은 “정부가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책 마련보다 책임 추궁에 골몰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려 하기보다 ‘누구 잘못으로 소를 잃었는지’를 먼저 따졌다는 것이다. 책임 추궁은 서로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져 슬픔과 애도가 가득해야 할 자리에 의심과 불신이 들어섰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고 원인이 책임 귀속의 문제가 되면서 책임을 묻는 집단과 책임을 져야 하는 집단으로 나뉘었다. 이는 결국 분열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책임 추궁’이 분열의 씨앗 뿌렸다
지난해 4월 21일, 청와대에서 세월호 참사 후 첫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18분간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단계별로 책임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며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의혹이 제기된 부분에 대해 한점 의혹이 없도록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주문했다. 재난대응 시스템 개선도 언급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발언은 ‘책임소재를 철저히 가리겠다’에 방점이 찍혔다.
검찰 수사는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사고 이튿날인 4월 17일 광주지검에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다. 사고 원인 조사가 임무였다. 수석비서관회의 전날과 당일 두 곳에 수사팀이 더 차려졌다. 인천지검에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를 표적으로 하는 세월호 실소유주 비리 특별수사팀이, 부산지검에는 해운업계 비리 특별수사팀이 구성됐다.
그러는 사이 진도 앞바다에서는 실종자 시신이 잇따라 물 위로 나왔다. 실종자를 찾고, 사고 원인을 찾고, 사고 배후를 찾는 일이 동시다발로 진행됐다. 노진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분열의 씨앗은 이때 뿌려졌다. 노 교수는 “사고 초기에는 시스템이 왜 잘못됐는지를 따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서 사고 배후를 캐는 쪽으로 양상이 달라지며 진흙탕이 됐다. 구원파가 등장하고, 진영 논쟁이 개입되고, ‘일베’가 끼어들었다. 초기 분위기가 이어졌다면 일베가 들어올 공간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가 여러 갈래로 진행되자 국민이 눈을 돌릴 곳이 많아졌다. 한편으로 안타까운 심정에 차가운 바닷속 실종자 수색 작업을 지켜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병언 일가 수사를 주목했다. 국외 재산도피, 탈세, 비자금, 특혜 대출 등 참사와의 관련성이 알쏭달쏭한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화를 낼 대상을 찾던 국민의 분노가 그들에게로 향했다.
같은 해 5월 19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도 진상규명보다 ‘문책’ 중심이었다. 박 대통령은 안전행정부와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했다. ‘관피아’(관료+마피아)를 척결하고 공직사회를 개조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진상규명은 순서가 뒤로 밀렸다. 박 대통령은 유족이 요구한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법을 만드는 건 국회의 일이었다. 7개월 진통 끝에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현재 상황은 ‘눈물의 대국민 담화’에서 더 진전된 게 없다.
정부의 진상규명 활동은 검찰 수사와 감사원 감사를 통해 진행됐다. 10월 6일 발표된 수사 결과는 유가족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유가족은 이튿날 사고 원인이 여전히 불명확하고 구조 실패의 책임도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다는 입장을 내놨다. 감사원은 주로 참사에 대응한 공무원의 잘잘못을 따졌다. 검찰과 감사원 발표에서 비슷한 사고를 막을 재발 방지책은 보이지 않았다. 국회에서도 90일간 국정조사를 했지만 청문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고 끝났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선진국은 대형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동안 당연시했던 전제나 가정 중에 잘못된 것은 없는지부터 살핀다. 대개 정치권이 이른 시일 안에 합의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최고 전문가를 모아 방대한 조사와 연구를 한다. 그래서 원인을 찾고 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사고의 근본 원인을 찾기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책임전가와 공방만 벌이며 1년이란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꼬집었다.
세월호, 고질적 이념 프레임을 만나다
참사 98일 뒤인 7월 22일, 전남 순천의 매실밭에서 발견된 시신이 유병언 전 회장으로 드러나자 국민은 허탈해했다. 사건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았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후 여론은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나뉘었다. 여러 세력이 ‘세월호 책임공방’에 끼어들었고, ‘세월호 피로감’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론의 분열은 ‘일베’ 회원의 극단적 행동을 계기로 정점으로 치닫게 된다. 세월호 유가족이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자 그들은 현장 주변에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이들의 행동은 진보·보수세력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세월호 유가족에 비판적이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도화선이 됐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폭식시위’보다 욕을 더 먹지는 않는 상황이 조성됐다.
세월호 유가족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이 일어나면서 공개적으로 유가족을 질타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일부 보수단체는 대놓고 농성 중단을 요구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진보세력이나 종북세력과 연관지으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렇게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에 내재된 ‘이념의 고리’와 만난다. 무슨 이슈든 불거지기만 하면 진보·보수의 대결로 변질시키는 기형적 메커니즘이다. 가상준 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 소장(정치외교학과 교수)은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공공갈등이 이념화된다는 것이고 그런 경향은 점차 강화되고 있다. 세월호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념대립 양상은 특별법을 둘러싼 국회 공방과 맞물리면서 한층 날카로워졌다. 여야 다툼이 길어지며 지지 정당에 따라, 이념적 가치관에 따라 세월호를 보는 국민의 시선은 더 세분화됐다.
참사 수습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의 역할과 기능을 대폭 축소한 특별법 시행령 안을 놓고 특조위·유가족과 정부가 맞서고 있다. 선체 인양 문제도 대통령이 ‘적극 검토’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 소모적 논쟁을 치러야 했다. 일부에서는 인양과 배·보상을 예산·비용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 갈등을 확산시키고 있다. 임윤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월호 문제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면서 “문제를 물질적 이해관계 차원으로 전환하면 개개인의 감정이 개입돼 분열이 더 크게 일어난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사고 원인 조사와 대책 마련’이라는 본질로 돌아가야 분열, 갈등이 완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김원섭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진상규명이란 토대 없이 책임을 묻는다면 정부가 진상을 덮으려 한다고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임윤택 교수는 “조사위는 사고 후 바로 꾸려졌어야 했다. 진상규명 활동이 지지부진한 사이에 다른 흐름의 논의가 생겨났다. 그 사이 우리는 과거로 회귀하지 않을 수 있는 골든타임도 놓쳤다”고 말했다.
권기석 박세환 기자 keys@kmib.co.kr
[세월호 1년, 갈등을 넘어 치유로] ‘책임 가리기’에 시간 허비… 의심·불신의 파도
입력 2015-04-13 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