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2) 한국에 선교사로 나오기까지

입력 2015-04-14 02:41
스크랜턴 가족이 출석했던 클리블랜드제일교회 전경. 이덕주 교수 제공
1889년 클리블랜드제일교회가 발간한 연감에는 스크랜턴 가족이 한국 선교사로 파송돼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감에는 ‘한국 선교사(Missionary in Corea)’로 표시돼있다. 이덕주 교수 제공
스크랜턴 대부인은 1832년 12월 9일 미국 메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뉴잉글랜드 감리교 목사인 에라스투스 벤턴(1805∼1884)이었다. 메리 플레처란 그의 이름은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와 함께 활동했던 18세기 영국 감리교회 여성 지도자 ‘메리 모상케 플레처’의 이름에서 땄다. 메리는 21세 되던 해인 1853년 부친이 목회하던 뉴헤이븐의 24세 청년 실업가 윌리엄 스크랜턴과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 3년 만인 1856년 5월 29일,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부부는 아이에게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기의 몸 속에는 뉴헤이븐 시의원을 지낸 할아버지의 피와 미국 감리교회 뉴잉글랜드 연회에서 50여년을 목회했던 외할아버지의 피가 섞여 흐르게 됐다.



사별한 메리 스크랜턴, 해외여선교회 적극 참여

스크랜턴은 뉴헤이븐 시의원을 지낸 할아버지와 제조 판매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당시 예일대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였던 중등과정의 홉킨스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홉킨스학교를 다니던 시절인 1871∼73년 사이에 가족과 관련된 많은 일이 일어났다. 1년 간격으로 친가와 외가 어른들이 세상을 떠났다. 특히 아버지가 42세의 나이로 별세한 것과 스크랜턴 가문의 명예였던 할아버지의 죽음은 16세 소년 스크랜턴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결혼 20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메리 스크랜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친정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시아버지를 1년 사이로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겪었다. 41세의 나이로 홀몸이 된 메리 스크랜턴은 이후 아들의 학업을 뒷바라지 하면서 교회 봉사와 선교활동에 많은 시간과 관심, 노력을 기울였다. 그 즈음 메리는 미국 감리교회 여성해외선교단체인 ‘해외여선교회’ 조직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뉴헤이븐의 해외여선교회는 뉴헤이븐제일교회 여성 교인들이 주도했는데, 메리 스크랜턴은 뉴헤이븐지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874년 지회 부회장으로 선출돼 지방 해외여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메리 스크랜턴이 지회 임원으로 활동하던 이 시기에 바로 로버트 매클레이 박사가 뉴헤이븐제일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했다는 점이다.

매클레이는 1884년 서울을 방문해 한국 선교의 문을 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감리교 선교사로, 그에겐 ‘극동아시아 감리교 선교의 개척자’란 칭호가 있었다. 매클레이는 1848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23년간 활동 후 1871년 안식년 휴가를 얻어 뉴헤이븐에 와 있었다. 이 시기에 메리 스크랜턴은 매클레이를 통해 극동아시아 선교에 관한 정보와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2년 후인 1885년 매클레이와 스크랜턴, 두 가족은 일본에서 다시 만나 한국 선교 개척을 추진했다.



윌리엄 스크랜턴, 의사의 꿈 이뤄

1878년 예일대를 졸업한 윌리엄 스크랜턴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뉴욕으로 갔다. 그가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은 어려서 티푸스를 앓았을 때 간호하던 어머니에게 “나중에 의사가 되겠다”고 했던 약속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리 스크랜턴도 뉴욕으로 옮겨 와 아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면서 뉴헤이븐에서처럼 해외여선교회 지회 및 지방회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이 소속했던 뉴욕지방회는 뉴잉글랜드 지방회 다음으로 조직된 지방회로,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운동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후에 메리 스크랜턴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되자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학박사(M.D.) 학위를 받은 1882년, 스크랜턴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결혼과 병원 개업이었다. 스크랜턴은 그해 6월 6일, 26세의 나이에 코네티컷 주 노리치에서 22세 루이자 암즈와 결혼했다. 루이자는 영국에서 뉴잉글랜드로 이민한 초기 청교도의 후예이자 코네티컷 지역의 종교·언론계를 대표하는 집안이었다. 결혼한 이들 부부가 자리를 잡은 곳은 미국 중북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였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도 동행했다. 결혼 1년 후엔 첫째 딸 오거스타를 얻었다. 가족은 클리블랜드제일교회를 다녔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은 청년회 지도교사 외에 주일학교 부교장과 속장으로 활동했으며 교회 여성 선교단체인 부인조력회와 해외여선교회, 국내여선교회 회원 및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여성이 여성에게 복음 전한다’

여기서 잠시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 대해 알아보자. 선교회는 1869년 3월 보스턴 지역 감리교 여성신도 8명이 모여 미 감리회 여성들이 외국에 여성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토착민 교사들과 전도자들을 후원하는 일을 연합해 추진하기 위해 창설됐다. ‘여성이 여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선교운동 목적 외에도 여성의 사회참여운동에도 힘썼다. 당시 미국 여성들에게 제한됐던 참정권과 정치, 사회 활동 참여를 확대해가는 가운데 교회 여성들도 남성들이 주도했던 해외선교 영역에 참여해 ‘독자적인’ 여선교사 파송과 지원 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보스턴에서 첫 조직이 탄생한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뉴욕과 뉴저지, 신시내티 등 교회에 지회가 설립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리하여 1년 만에 미국 주요 도시의 거의 모든 교회들에 지회가 설립됐고 창립 10년 만인 1879년에 이르러서는 8개 지부로 확산됐고 지부 산하에 30∼50개 지회가 있어 매년 8만 달러 규모의 선교비를 모금해 해외 선교사들을 지원했다.

메리 스크랜턴이 속했던 클리블랜드에서는 1870년 해외여선교회 지회 및 지방회가 조직됐다. 메리 스크랜턴은 단순히 해외 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회비를 내는 회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해외여선교회 지회나 지방 모임에 강연자로 참석해 회원 가입을 독려하는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렇게 적극적인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선교사역, 특히 은둔국인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