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군의학교에서 6주간 교육을 마치고 동기 8명과 함께 국군수도통합병원(당시 서울 소재)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만 해도 좋았다. 우연찮게 위생병과를 받았던 데다 이게 웬 조화인가 했다.
한데 그곳 위생병노릇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밤 집합과 얼차려 등은 차라리 그러려니 했다. 자대 배치된 지 3주쯤 되던 1978년 9월 어느 날, 첫 응급실 야간 당직근무 때였다. 자정 무렵 지뢰 사고로 다친 병사 3명이 헬기로 후송돼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벌써 숨을 거둔 상태였다. 중태인 2명은 긴급 수술이 이뤄졌는데 문제는 사망 환자였다.
당시 군 병원에서 사망 환자가 발생하면 병실 위생병이 뒷수발을 해야 했다. 그렇게 생전 처음 염을 하게 됐다. 사망한 병사는 쇠구슬 파편에 온몸이 찢겨 피가 멈추지 않았다. 군번으로 보아 입대시기가 나와 비슷했는데 그의 노란 이등병 계급장은 검붉게 변해 있었다.
이후 사태가 어떻게 수습됐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응급실 선임병이 지시한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상처 부위를 꿰매고 또 꿰매고, 핏물을 닦아내고 새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십자 매듭으로 시신을 묶고, 영안실로 인계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녘. 겨우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바로 앞 언덕 위에 있던 군인교회를 향해 빨려가듯 달려 올라갔다. 지난 5시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많은 생각들이 몰려왔다. 죽은 병사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익숙하지 못한 기도로 하나님을 불렀다. 그의 죽음은 무엇인가. 왜 나는 이곳에 있나.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고. 나는 어찌해야 하나. 한참을 호소하던 끝에 그가 나 대신 죽었겠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귀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그날 죽은 병사의 존재를 조금도 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죽음의 의미가 어떠했든 그 죽음에 대한 빚진 마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37년 전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지난해 봄부터였다. 정확하게는 그해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세월호 침몰사태 이후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1년 우리 사회는 말할 수 없는 비탄과 참담함과 울분과 불신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휘청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병리학자이자 대형 참사 유족들의 슬픔에 대한 문제를 추적해온 일본의 노다 마사아키는 지난해 복간된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에서 희생자들의 죽음의 이유를 사회적 의미로 재창조해야 유족들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봤다. 유족들에 대해 사회가 인내를 갖고 배려하는 ‘사회적 상(喪·추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세월호 문제는 수습된 듯하다. 세월호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 구조에 소홀했던 해경 정장 그리고 해운업계 비리 관련자 등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세월호가 속한 청해진해운에 대한 재산 가압류도 이뤄졌다. 이어 세월호특별법이 어렵사리나마 마련됐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에 대해서도 논란이 들끓는다. 정부와 유족 그룹들, 이를 지켜보는 시민단체들 사이에 만연된 불신 탓이다. 서로가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추모’는커녕 고통은 커지고 분노는 거세질 뿐이다.
이제는 온갖 주장을 뒤로하더라도 304인의 죽음에 빚진 자들의 고백이 우선돼야 한다. 4·16 1주기에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에 빚진 이 사회에도 부활의 빛이 다시 비춰져야 하지 않겠나.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조용래 칼럼] 그들의 죽음에 빚진 우리는
입력 2015-04-13 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