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리스트’ 파문] 금품수수 리스트 작성 왜… 구명 요청 끝내 좌절되자 막막함에 폭로 결심 가능성

입력 2015-04-11 02:29
9일 숨진 채 발견된 성완종(64) 전 경남기업 회장은 왜 ‘금품 메모’를 작성해 소지하고 있었을까. 현 정권 유력 인사들을 겨냥하는 이 메모를 언제 작성했는지, 밤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자회견 다음날 목숨을 끊었는지 등도 메모의 진위만큼이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성 전 회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비리 의혹을 반박한 건 8일 오후 2시였다. 무고함을 반드시 입증해보이겠다는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는 변호인인 오병주 변호사와 환담을 나눈 뒤 헤어졌다. “나는 떳떳해서 문제없을 거라 생각한다”며 웃기도 했다고 한다. 귀가 길에는 리베라호텔 사우나에 들른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자주 찾는 곳이었다.

성 전 회장은 그날 저녁 오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변호사는 다음날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변론서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변론을 맡은 뒤 거의 매일 성 전 회장과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오 변호사는 “그날 저녁도 식사를 같이 하려고 전화하신 것 같다”고 했다. 변론서 준비로 바빴던 그는 서류가 마무리되면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오 변호사가 성 전 회장에게 전화한 건 밤 10시 반쯤이다. 완성된 변론서를 비서관 이메일로 보냈다고 알렸다. 성 전 회장은 다음날 오전 9시 반쯤 오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나 같이 법원에 가기로 했다. 이 마지막 통화에서도 극단적 선택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목소리가 침울했다고 오 변호사는 전했다.

다음날 오전 5시쯤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선 성 전 회장은 오전 6시쯤 경향신문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김기춘·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거액을 건넸다고 주장했다. 이후 북한산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이런 정황을 보면 성 전 회장은 8일 저녁과 9일 새벽 사이에 급격한 심경 변화를 일으켜 자살을 결심하고 폭로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시신에서 필기구나 다른 종이가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메모는 집을 나서기 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메모가 웃옷 바깥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것은 발견되기를 바랐다는 의미가 강하다. ‘전화 폭로→자살→메모 발견’이 그가 계획한 시나리오일 수 있다.

이런 심경변화를 일으킨 원인은 뭘까. 그는 검찰 수사 이후 여러 곳에 ‘구명’을 요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메모에 등장하는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은 “(성 전 회장 전화를 받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말도 전한 바 있다”며 “(부탁을) 거절해 인간적으로 섭섭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기자회견도 사실상 현 정권을 향한 구명 요청 메시지였다. 이날 밤사이 구명을 기대했던 마지막 유력 인사와의 통화 등에서 끝내 기대가 좌절되자 원망과 막막함에 ‘결심’했을 수 있다.

성 전 회장이 사망 당시까지 갖고 있던 구형 ‘폴더폰’ 휴대전화 2대가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통화 내역과 문자메시지 등에서 유력 인사들이 연루된 정황이 새롭게 드러날 수 있다. 수사당국은 조심스러운 기색이다. 경찰 관계자는 “일반 변사자 휴대전화와 마찬가지로 취급하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통화내역 등을 조사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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