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7080 찬양콘서트’로 무대 오른 장욱조 노문환 김석균 김민식] 교회의 쎄시봉, 찬양여행 떠나다

입력 2015-04-11 02:01
노문환·장욱조·김석균 목사와 김민식 전도사(왼쪽부터)가 지난달 23일 서울 동작구 CTS아트홀에서 열린 '추억으로 가는 찬양여행' 7080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김석균 목사 제공
김민식 전도사와 장욱조·김석균 목사(왼쪽부터)가 최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은혜 렛잇비' 후렴구 '주님의 소유우∼∼∼'를 부르며 오른손 검지를 높이 올리고 있다. 허란 인턴기자
그 시절 언니들이 ‘쎄시봉’ 노래에 열광했다면 자매들은 ‘은혜 찬양’에 눈물 흘렸다. 1970, 80년대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조영남이 서울 무교동 음악다방 쎄시봉을 중심으로 대중음악계에 포크송을 보급했다면 장욱조 노문환 김석균 김민식은 은혜 찬양을 부르는 교회의 ‘포크송 전도사’였다. 쎄시봉에서 불린 노래와 교회에 퍼진 은혜 찬양의 공통점은 통기타 반주로 사랑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당신’이었다. 대중가요 속 당신은 ‘연인’인 반면 은혜 찬양의 당신은 ‘주님’이었다. 장욱조 노문환 김석균 김민식은 모두 가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나섰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노래하고 새 삶을 간증했다. 하나님 안에서 형제처럼 지낸다. 하나님 형제 ‘장 브라더스’는 그동안의 삶과 노래를 나누기 위해 ‘추억으로 가는 찬양여행’ 7080콘서트를 시작한다고 10일 밝혔다.

김민식 교회판 ‘은혜 렛잇비(Let It Be)’

지난달 23일 저녁,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년 여성부터 은발의 노신사들이 서울 동작구 CTS아트홀 400여석을 가득 채웠다. 장욱조(67) 노문환(65) 김석균(64) 목사와 김민식(60) 전도사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모인 이들이다. 그 시절 ‘교회 누나’와 ‘교회 오빠’들일 것이다. 김 전도사의 인사말이나 김 목사의 노래에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했다. ‘쎄시봉 친구들’ 공연의 교회판이다. 전국 릴레이 투어로 진행될 7080콘서트의 첫 무대였다.

비틀스의 유명 곡 ‘Let It Be’ 반주가 흘러나왔다. 나이로 가장 젊은 ‘막내’ 김 전도사가 마이크를 든다. “한땐/ 미남소리/ 깨나/ 듣고/ 살았답니다∼ 지금/ 나는/ 유통기한/ 지난/ 꽃미남∼.”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폭소가 터진다. “그러나/ 주님만/ 기억해주신다면/ 나는/ 천국의/ 영원한/ 아이돌∼.” “아멘”이란 화답이 나온다. 이 반응에 또 웃음이 터진다.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렛잇비’를 장 브라더스 버전으로 만든 것이다. 최근 서울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국민일보 본사에서 장 브라더스를 인터뷰했다. 김 전도사는 77년 자작곡 ‘나의 사람아’로 대중가요계에 데뷔한 뒤 ‘첫사랑의 생일’ ‘찬비 속의 환상’ 등의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80년 군 제대 후 여자친구를 따라 교회 부흥회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났다. 유명 가수를 알아본 목회자가 그를 강단에 세웠다. 특송하라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강물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날 방언이 터졌고 큰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이후 주님께 이끌리는 영혼이 됐습니다. 영안이 열리고 돌아보니 오래전부터 내 안에 하나님을 위한 공간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됐어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깨진 것처럼 저도 이날 특송으로 주님을 향해 날아올랐다고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노래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그는 80년 ‘저 어둠 속이면 어때’를 만든 뒤 본격적으로 복음성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83년 청소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 음악 교사로 출연 제안을 받았다.

“주의 일을 해야 한다고 다짐한 뒤라 처음엔 운군일 PD의 제안을 거절했어요. 출연자들이 고교생이니까, 녹화도 학교 안 가는 매 주일이었어요. 그러다 청소년문화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락했어요. 대신 조건을 달았죠.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연습은 못한다고. 사전 연습 않고도 엔지(NG)를 거의 내지 않았어요(미소).”

나중엔 배역이 점점 커져 당시 학생으로 출연한 하희라 채시라 등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년가량 드라마를 통해 얼굴을 많이 알린 일은 청소년 사역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는 82년부터 CBS 라디오 ‘찬양의 꽃다발’을 4년 동안 진행했다. 이어 극동방송 ‘찬양의 광장’에서도 10년 동안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틀었다. 그에게 “함께 부흥회 갔던 여자친구가 혹시 지금의 아내냐”고 물었다. 김 전도사는 “유감스럽게도 그렇다”며 크게 웃었다.

장욱조 ‘고목나무에서 생명나무로’

장 목사는 복음가수 이전 대중가요 작사·작곡가로 더 유명하다. 조용필 ‘상처’, 최진희 ‘꼬마인형’, 박정식 ‘호랑나비’, 조경수 ‘아니야’, 유미리 ‘젊음의 노트’ 등 1000여곡을 만들었다. 79년 발표한 ‘고목나무’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 노래로 KBS ‘가요톱10’에서 7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오래가진 못했다.

“가왕(歌王) 조용필이 등장했죠. 저는 바로 밀렸습니다. 조용필은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친구여’ ‘허공’을 불렀고 80년부터 6년 연속 가수왕을 했어요. 전 음반을 냈지만 빚만 계속 쌓였어요.”

그는 지금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내가 교회에 간다고 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86년 3월 22일 토요일에 아내가 처음 교회에 간다고 했어요. 그 날짜를 잊을 수 없어요. 저는 절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빈말로 여든 되면 교회 간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이었습니다. 3월 23일 연예인교회에 아내를 데려다주고 전 돌아왔어요. 그 다음주 아내가 한 번만 가자고 해서 제 발로 처음 갔어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고은아 권사가 그를 가장 반갑게 맞았다. “80년쯤 방송국에서 고 권사가 절 전도해서 제가 교회에 간다고 해놓곤 고 권사를 바람맞힌 적이 있었어요. 고 권사가 ‘6년 전 교회 밖에서 40분 동안 기다리다 들어와 장 선생 교회로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드디어 응답해주셨다’면서 기뻐했어요. 전 속으로 ‘오늘만 오고 안 온다’고 했는데 서수남 장로가 같이 찬양대 하자고 붙들고….”

장 목사는 그날부터 15년 동안 교회 성가대에 섰다. “86년 성가대회에서 만난 민식이가 나한테 ‘형님, 조금 있으면 유행가 때려치울 걸’이라고 할 때만 해도 ‘내 밥줄인데 미쳤냐’ 그랬거든요. 근데 믿음은 생계까지도 내려놓게 만들더군요.” 88년 복음가수로 전향했고 절망 속에서 예수를 만나 생명의 꽃이 폈다는 노래 ‘생명나무’를 지었다. ‘고목나무’ 가수가 그야말로 ‘생명나무’ 가수가 된 것이다.

장 목사는 공연 중 고목나무와 생명나무를 연이어 부른 뒤 마이크를 잡았다. “큰 교회의 어르신 초청 예배에 갔어요. 설교가 길어지면서 어르신들이 꾸벅꾸벅 조셨습니다. 다음 순서인 제가 걱정돼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내가 이때 쓰려고 널 대중가수 시킨 거다’ 하세요. 고민 끝에 제가 즉석에서 요한복음(14:6)으로 트로트를 만들어 불렀어요. 반응이 엄청났죠.”

장 목사가 무대에서 이 '뽕짝' 찬양을 부르자 박수가 터졌다. 후배들과 함께 노래하는 시간도 있었다. 김 전도사와 최덕신은 '불속에라도 들어가서'와 '나', 김 목사는 황국명과 '고백'과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를 열창했다.

김석균 35년간 한 달에 한 곡 작곡

김 목사는 다윗과 요나단을 비롯해 많은 CCM 가수들에게 노래를 만들어줬다. 지금까지 복음성가 400여곡을 지었다.

데뷔한 81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한 달에 한 곡꼴로 작곡한 셈이다. 김 전도사는 "형님이 국어선생님이셨거든요. 우리말에 복음을 담아 '사랑의 종소리' 등 주옥같은 노래를 많이 만들었어요. 광화문에 김석균 시비를 세워야 해요"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20년 동안 서울 문일고 국어교사로 재직한 뒤 2000년 퇴직했다.

"쉰이 될 때 오산리금식기도원에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갖고 기도했어요. 그때 고3을 맡았는데 목소리가 갑자기 안 나와요. 수업을 못했죠. 직장도, 사역도 위기가 온 겁니다. 하나님이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저를 이끄시는 것 같아서 그해 4월 초 명예퇴직을 신청했어요." 김 목사는 퇴직 직후 CTS로부터 '내 영혼의 찬양' 프로그램 진행을 제안받았다.

김 전도사가 덧붙였다. "갈수록 복음이 토핑이 되는 시대가 되고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토핑이 아니라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형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안정된 직장을 버린 거죠." 김 목사는 '은혜 렛잇비' 자기 파트에서 "국어선생/ 이십년에/ 연금/받게/ 되었죠/ 마누라가/ 그래서/ 내가/ 좋대요/ 그렇지만/ 내/ 소망은/ 하늘연금이지요/ 천국에/ 보화를/ 쌓으며/ 살고/ 싶어요"라고 노래했다.

장 목사가 89년 김 목사와 함께 CBS '새롭게 하소서' 미국 투어 공연을 갔을 때 얘기를 꺼냈다. "공연 마치고 숙소에 들어갔는데 김 목사가 저한테 팬티랑 양말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빨래 해준다고. 그 시절엔 연예인 후배가 선배 빨래 해주는 문화가 있었거든요. 그 섬기는 마음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실행력이 얼마나 좋은지 이번 공연도 김 목사가 기획했어요." 김 목사는 매사 민첩하면서도 '섬김'을 놓치지 않는다고 했다.

노문환 ‘사도행전 29장을 쓰자’

노 목사는 76년부터 부산을 거점으로 늘노래선교단을 이끌어 왔다. 장 목사는 "노 목사는 '예수에 미친 놈'이란 소리를 많이 듣는 사람"이라고 했다. 노 목사의 대표 전도법은 '목욕탕 전도'다. 뜨거운 탕에 들어가 사우나 하는 이에게 "뜨겁죠?"라고 한다. 그러면 상대가 대개 "예" 한다. 그러면 노 목사는 "지옥은 더 뜨겁습니다"라며 복음을 전한다.

노 목사는 자기 전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의외로 목욕탕 전도가 잘 돼요. 허허. 목욕탕 수온은 기껏해야 41도이지만 지옥은 수천 도 뜨거운 불이죠. 복음을 알게 되면 새 삶을 살게 되는데 언제 어디서든 전해야죠." 그는 군생활 할 때 군악대에서 색소폰 등 악기를 배웠고 부산 유흥가에서 반주를 하다 하나님을 만나 이 길로 들어섰다.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제 모습을 하루도 잊어본 적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알코올 중독자나 노숙인이 됐을 거예요.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했으니까요. 꿈이 없었죠. 하나님을 만나고서 이렇게 복음 전하는 자로 쓰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인생입니까?" 그는 예수 믿는 우리는 성경 사도행전 28장에 이어 29장을 써 가야 한다고 믿는다.

네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역 현장에서 만나 30여년 하나님의 형제로 지내왔다. 함께 신학 공부를 하기로 하고 뒤늦게 신학대학원에 입학, 3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매년 한 차례 아내를 동반해 가족여행을 다닌다. 지난해 봄에는 다함께 춘천 공지천에 놀러 갔다. 각자 찬조 출연을 요청하면 열 일 제쳐놓고 가서 무대에 선다. 이들의 사역기간을 합치면 무려 140년이다. 이 삶과 노래를 나누기 위해 7080콘서트를 준비했다.

"일회성 공연이 아닙니다. 어디든 달려가려고 해요. 함께 옛 노래를 부르며 열정적이었던 은혜의 현장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울에서 시작했는데 다음엔 부산 춘천 목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김 목사의 설명이다. 첫 7080콘서트 실황은 다음달 2일 오후 9시 CTS에서 볼 수 있다. 무료로 공연을 관람하는 대신 헌금을 거둬 다음 공연비용으로 충당할 예정이다(공연 문의 010-5268-0151).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