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에서 삼척이라는 지점을 자로 대고 그으면 일직선이다. 직선 230㎞. 그런데 이 삼척에 복음이 들어오기까진 27년이 더 걸렸다. 1912년 4월 19일 삼척 북평(현 동해시) 출신 한학자 김한달이 삼척군 부내면에 기도처를 정하고 예배를 드렸다. 옛 삼척도호부 동헌 인근이자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 앞으로 추정된다. 김한달은 초대 전도인이 되어 삼척 김씨 문중을 중심으로 전도를 했다. 미신이 유독 강했던 바닷가 고을인지라 냉대와 멸시가 따랐다. 김한달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울면서 예수 부활을 얘기했다. 그의 별명이 ‘울벵이 전도사’였다.
그 기도처는 오늘 삼척지방의 모교회가 됐다. 1000여명 재적의 큰 교회다. 시작은 5명이었다.
박신진 목사는 이날 ‘부활절에 있었던 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예배당 본당 1, 2층이 꽉 찼다. 소도시의 주일 아침은 조용했으나 교회는 기쁨이 넘쳤다.
박 목사는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신 소식, 죽음을 이김으로 생명과 창조의 기운이 가득하게 된 일, 절망이 변하여 희망과 기쁨이 된 것, 이것을 스스로 깨닫고 전하라는 것이 부활의 메시지입니다”라고 전했다.
냉대와 멸시를 이겨낸 이들의 후대. 이들은 이날 오후 2시 삼척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주관했다. 삼척 관내 54개 교회가 ‘서해 제물포에서 동해 땅끝 삼척까지’ 복음이 완성됐음을 선포한 것이다. 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박 목사는 ‘주와 함께 살리라’는 설교를 통해 사망 권세를 이긴 예수를 증언했다.
제물포에서 삼척까지 27년 걸렸다
예술회관 앞은 삼척시내를 관통하는 오십천이 흐른다. 태백산맥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다와 맞닿는 곳이 삼척시내다. 예술회관 건너편 오십천 절벽 위로 보물 213호 죽서루가 위풍당당하다. 조선시대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의 부속건물이었다. 삼척 사대부와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의 휴식공간이 죽서루였다.
조선 동해바다를 지키던 삼척성읍. 그러나 그 성읍은 19세기 말부터 급격히 무너졌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도 잃었다. 그리고 광물자원이 풍부한 삼척 일원은 일제의 병참지대가 됐다. 수탈이 일상화됐다. 이 고을 백성은 길고 어두운 구름이 태백산맥을 넘어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했다. 동헌이 식민지 군청이 되고, 크고 작은 관아 건물이 헐리거나 도로로 바뀌었다.
고을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다. 누구도 그들을 구원해주지 못했다. 더구나 삼척은 한반도의 오지였다.
그 땅에 1912년 복음이 들어왔다. 그해 4월 14일 저 서구에선 호화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해 1500여명이 하나님의 가호를 빌며 죽었다. 그 닷새 후 저 조선 동쪽 끝 옛 고을에 찬송이 처음으로 울려퍼졌다. 하나님 시간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5월 삼척의 첫 교인들은 한식 목조 세 칸 집을 처음 매입하여 기도처가 아닌 예배당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 목조 여섯 칸을 구입했다. 다시 이듬해 목조 여덟 칸을 매입해 반석 위의 예배당을 열었다.
이렇게 시작한 성내동 6번지 삼척제일교회는 죽서루와 오십천, 그리고 읍내를 눈아래 두고 복음의 전진기지가 됐다. 첨탑이 우뚝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으나 ‘하나님 나라’만은 그들의 것이었다.
삼척 첫 기독교 교육기관은 1925년 4월 15일 개교한 삼성유치원이다. 교인들은 죽서루 앞 6번지에 현대식 2층 예배당을 헌당한 이후였다. 이 현대식 예배당이 언제 헌당됐는지는 자료 부족으로 알 수 없다. 다만 1943년 5월 발행된 조선감리회보 제1권 5호에 따르면 ‘1933년 3월 30일부터 4월 4일까지 새 예배당에서 전도대회를 개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으로 추정할 뿐이다.
“돼지새끼 날 때마다 첫 것은 하나님께”
당시로서는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한 2층 건물은 위층이 예배당, 아래층이 유치원으로 사용됐다. 유치원은 30년대 말 공립 직업학교(현 강원대 삼척캠퍼스 전신) 교사로 쓰이기도 했다. 목조 벽체와 함석지붕을 얹은 일본식 건물이었다. 헌당과 함께 전도집회를 열어 새신자 32명을 얻게 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쁨에 ‘장임옥 내외는 십일조(를 내고 이와 함께)와 돼지새끼 날 때마다 첫 것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했다. 교회 성장기였다.
이 무렵 교회는 당시 관내에 있던 북평교회, 천곡교회 등과 연합 야외예배를 추암리 능파정에서 갖기도 했다. 이듬해 10월에는 이 예배당에서 지방교역자 수양회를 열기도 했다.
1930년대 삼척은 일제의 수탈을 위한 공업도시였다. 서해안 군산이 농산물 수탈지인 것과 같았다. 조선감리회보는 ‘금은동철을 산출 중이고 무연탄을 300년간 생산계획’이라는 내용을 선교보고에 담았다. 현 태백시가 당시 삼척군에 속했으므로 무연탄 생산량이 많았다. 광물은 삼척, 해산물은 묵호·북평항을 통해 수탈됐다. 이 시기 교회는 순회 사경회를 통해 구역 내 천곡, 옥계, 묵호, 북평교회 등을 돌며 영적 추수에 나섰다.
그러나 1944∼45년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교회가 통폐합되거나 관제 교회만 남게 됐다. 삼척제일교회는 폐쇄의 길을 택했다. 한기모 목사는 폐쇄된 교회에 끝까지 남아 통분의 기도를 하다 연행되어 고초를 당했다. 신사참배 과정에선 삼척구역의 천곡교회 최순규 권사가 끝까지 “하나님 외에 왕은 있을 수 없으며 인간 천황에게 절할 수 없다”고 저항했다. 그는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하다 후유증으로 순교했다. 그 유해가 한동안 삼척제일교회 마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 기념비만 새 성전 마당에 서 있다. 한편 일제는 삼척제일교회 예배당을 ‘강원도 토목관구 사무소’로 사용했다.
예배당에 날아온 신발…기도의 여인
주일 오후 목양실. 윤순자(81) 신복남(77) 원로권사, 이상교(69) 시무장로가 광복 이후의 신앙생활을 얘기했다.
윤 권사는 원주에서 중학교 교사인 남편을 따라 한국전쟁이 끝나고 삼척에 들어와 이 교회를 섬겼다. 교사 부부였다.
“가난한 시절이었어요. 모든 게 부족했고요. 함석지붕 예배당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외지로 발령이 났어요. 참 가기 싫었죠. 월정 헌금도 못 내고 가게 됐는데 ‘주님, 꼭 다시 와서 바치겠습니다’라고 다짐했어요. 그걸 이뤄주시더라고요.”
신 권사는 기도의 여인이었다. 매일 밤 8∼12시, 그 찬바람 송송 드는 목조 예배당 바닥에 엎드려 눈물의 기도를 하곤 했다.
“강단 앞에 멍석을 깔고 매일 울며 기도했어요. 예배당 이웃 사는 분들이 시끄럽다며 목조 건물에 신발을 던지던 기억이 나네요. 그만큼 간절히 매달렸어요.”
이상교 장로는 삼척산업대(옛 공립 직업학교·현 강원대 삼척캠퍼스) 교수로 근무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1987년 죽서루 앞 교회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기 전까지 교회 근처 관사에 살면서 학원 선교 등에 힘썼다. 삼척제일교회 청년부는 그의 학원 사역 열매이기도 하다.
“저를 통해 예수 복음을 받아들인 학생 가운데 목회자가 되고 장로가 된 이가 많아요. 네비게이토 교재 등을 이용해 공부시켰어요. 죽서루를 거닐며 청년들과 교제를 나누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들이 한국교회 장년이 되었지요.”
그와 함께 콘크리트 다리 죽서교를 건넜다. 삼척시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예전엔 흔들거리는 출렁다리가 유일했어요.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좁았죠. 지금은 넓은 다리로 이렇게 차를 타고 건넙니다. 한데 세상은 좋아졌으나 안타까운 점도 많아요. 예전 부활절 연합예배는 야외에서 수천 명씩 모여 뜨겁게 기도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해요. 한국교회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생명의 다리를 건넌 후 자신을 건네준 그 다리가 예수의 보혈이라는 걸 잊은 거죠.”
삼척제일교회는 ‘전도대’ 활동을 최우선으로 한다. 지난 7일에도 교육관에서 전도대원과 교구장, 선교회장이 참석해 집중 점검과 기도회를 마쳤다. 그들은 핍박 받던 ‘이집트 포로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도와 전도는 시작과 끝이었다.
삼척=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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