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년, 갈등을 넘어 치유로-릴레이 인터뷰] ④ 단원고 故 양온유양 아버지 양봉진씨

입력 2015-04-09 02:56
단원고 2학년 고(故) 양온유양의 아버지 양봉진씨가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전시회에서 온유 앞으로 온 편지들을 읽고 있다. 이 편지는 전남 진도 팽목항에 설치된 ‘하늘나라 우체통’으로 보내진 것이다.김지훈 기자
고(故) 양온유양
지난 1년은 슬픔을 가슴 속에 눌러 담는 시간이었다. 인정하기 싫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마음과 몸에 남은 상처는 너무 깊었다. 그래서 ‘왜’를 찾아다녔다.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나’라는 질문의 답을 못 찾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계절이 네 번 바뀌었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빛과 생명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전시회에서 양봉진(49)씨를 만났다. 안산 단원고 2학년 2반 고(故) 양온유양이 그의 맏딸이다.

‘다친 동료를 버려두고 어른들이 속옷 바람으로 도망쳐 나올 때… 온유야, 넌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살려 달라는 비명 소리를 따라 객실 안으로 내려갔지. 미안해, 잊지 않을게.’ 양씨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온유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있었다. 전남 진도 팽목항에 설치된 ‘하늘나라 우체통’에 부친 편지다. 전시회에선 이 우체통에 담긴 편지 5000여통이 공개됐다.

양씨는 딸에게 보내진 편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이름 한 글자, 한 글자를 쓰다듬었다. “시간만 훌쩍 지났지 마음은 그때에 멈춰 있어요.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지만 ‘뭐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허하죠. 슬프긴 슬프지만, 그래도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그동안 그는 ‘왜’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왜 그렇게 일찍…

1년 만에 만난 양씨는 많이 수척해 있었다. 몸무게가 8㎏ 넘게 빠졌다고 했다. 32인치였던 허리는 28인치까지 줄었다. 대신 마음에는 슬픔을 넘어선 고요함이 자리 잡았다.

사고 직후 얼마동안은 먹은 것이 없는데도 상실감에 헛배가 불렀다. 밥맛도 없었다고 한다. 양씨에게 온유는 기쁨 그 자체였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화가 날 때도 온유의 미소를 보면 마음이 평안해지곤 했다. 냉장고나 책상 등 집안 곳곳에 ‘아빠 힘내세요’라고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 놓을 정도로 아빠를 먼저 생각해주던 딸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답을 찾으려 나름의 퍼즐을 맞춰 나갔다. “온유 태몽이 바다였어요. 그리고 태명은 부활이었고요. 그래서 그렇게 떠나간 건지….” 온유는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가 부활절에 발견됐다.

“계획에 없던 막내를 주신 이유도 언니가 그렇게 될까봐 덤으로 주신 것 같더라.” 양씨는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일상으로 돌아오려 애쓰고 있었다. 가끔 들려오는 온유에 대한 주변의 얘기, 추억은 작으나마 위로가 됐다. 최근에 온유의 마지막 모습을 가장 잘 기억하는 생존자의 얘기를 지인을 통해 전해 들었다. 사고 당시 여러 사람을 통해 듣긴 했지만 혹시 다른 사람을 착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던 참이었다.

“온유를 갑판으로 끌어 올려준 친구가 있어요. 체격이 좋은 친구인데 살려 달라는 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손을 뻗어 당긴 게 온유였다고 하더라고요.” 친구 도움으로 갑판에 올라올 수 있었지만 온유는 자신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친구들을 그냥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선실로 내려갔다.

다른 지인은 온유가 하얀 옷을 입고 100여명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는 꿈을 꿨다고 들려주기도 했다. 둘째 화평(17)이도 “6일 연속 꿈에 밝은 미소를 머금은 누나가 나왔다”며 “천국과 이 땅을 오갈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했다.

양씨는 딸이 보고 싶으면 휴대전화에 저장한 사진을 들여다봤다. 학예회, 재롱잔치 등 어린시절 사진들이다. 그는 “이제는 만져볼 수도, 대화할 수도 없지만 가슴에 기억으로 살아있으니까 괜찮다”고 했다. 이어 “온유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좋은 곳에 갔으니까”라며 안타까움을 달랬다.



세월호, 그 후

사고 이후 양씨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5년간 해오던 교회 관리집사 자리를 내려놨다. 교회 사택에서 나와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온유의 흔적이 깃든 집이지만 마음에 항상 함께 있다고 생각해 결단을 내렸다. 대신 교복이나 생필품은 다 갖고 나왔다. 온유의 영정사진을 액자 틀만 바꿔 새로 이사한 집 거실에 걸었다. 매일 사진을 보며 인사를 나눈다.

새 직장도 구했다. 사실 양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한 달 전 환경미화원 시험을 봤다고 한다. 그동안 수없이 도전해 왔던 일이었다. 필기와 체력시험, 면접까지 보고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 일’이 터졌다. 얼마 뒤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산시 측은 그런 양씨의 상황을 배려해 임용 날짜를 6개월 뒤로 연기시켰다. 양씨는 지난 2월부터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다.

“월급도 괜찮아요. 주일도 지킬 수 있고요.” 다만 양씨는 온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를 항상 생각한다. “제 일을 찾으면 뭐해요. 애가 없는데.” 불쑥불쑥 진한 아쉬움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철부지 둘째 화평이는 ‘첫째’가 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안 하던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쩍 어른스러워졌다고 한다. 언니의 빈자리를 누구보다 크게 느낄 셋째 사랑(15)이와 막내 나엘(12)이도 슬퍼할 부모를 생각해 내색하지 않고 밝게 지낸다고 했다.

온유의 휴대전화 번호는 막내에게 줬다. 온유의 SNS 계정에 새 글이 뜨면 막내 휴대전화로 알림이 온다. 온유의 SNS 계정에 접속하는 게 양씨의 새로운 일과가 됐다. 얼마 전 있었던 온유 생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양씨 가족은 ‘2014년 4월 16일’에 멈춰진 시계를 조금씩 앞으로 돌리려 한다. 새로 가족사진을 찍을 예정이다. 세월호 참사 1년 전 여름에 찍은 가족사진이 거실에 걸려 있지만 온유가 가장 잘 나온 사진으로 합성해 다시 가족사진을 만들 예정이다. “가족이 여럿이다 보니 한 명이 잘 나오면 다른 한 명이 눈을 감고 그렇더라고요. 제일 잘 나온 사진들로 가장 예쁜 가족사진을 만들려고요.”

양씨는 지난달 16일에 쓴 온유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를 팽목항 ‘하늘나라 우체통’에 넣었다. 이 우체통 한쪽 면에는 온유가 생전에 썼던 글이 새겨져 있다. 참사 후 우체통을 만든 이가 온유의 글을 보고 디자인에 활용했다.

‘겁내지 마라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기죽지 마라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슬퍼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조급해하지 마라 멈추기엔 이르다. 울지 마라 너는 아직 어리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