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경이 돼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1년 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우리의 생각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상상도 못했던 충격을 경험하고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다. 기억하자고, 달라지자고 입을 모았다. 어른들의 탐욕과 무능이 무고한 아이들을 죽게 했으며, 그 밑바닥에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니 철저히 파헤쳐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응집된 여론에 정부는 ‘국가 개조’라는 말까지 꺼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편이 나뉘었다. 의혹을 제기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쪽과 다 밝혀졌는데 뭘 더 밝히느냐는 쪽이 갈렸다. 이렇게 넘어갈 수 없다는 쪽과 그만큼 했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쪽이 부딪혔다. 봄꽃과 함께 찾아온 ‘세월호 트라우마’에는 낙엽이 질 무렵 ‘세월호 피로감’이 물들어 있었다. 농성을 하고 단식과 삭발을 하는, 국회에서나 봄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세월호가 가라앉지 않고 제주도에 도착하게 하는 데 실패했다. 그 배에서 304명을 살려내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충격과 슬픔을 치유하는 일에, 실패를 통해 배우는 일에 또 실패하고 있다. 9·11테러 등에서 목격했듯 대형 재난은 사람들을 결속케 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왜 결속 대신 갈등을 겪고 있나. 이 질문의 답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세월호가 침몰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이념과 음모 끼어들면서 갈등 커져
혹시 이 거대한 사건에 고질적인 진영논리가 끼어든 것은 아닌가. 지난해 정치권의 세월호 특별법 협상 과정은 기묘했다. 여당과 야당이 의견을 조율하고 나면 야당이 유가족을 찾아가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곤 했다.
언제부턴가 세월호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이슈가 돼버렸다. 보수 진영에서는 “정치 선동”이라고 공격했다. 급기야 세월호 단식농성장 옆에서 ‘폭식농성’을 하며 유가족을 종북세력으로 몰아세우는 극우 집단까지 등장했다. 지금 세월호 문제에서 입장이 갈려 있는 경계선은 우리 사회의 이념지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혹시 가벼운 입에서 흘러나온 음모론에 휘둘린 것은 아닌가. 분열은 불신(不信)에서 비롯된다. 세월호는 애초에 불신을 부르는 사건이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잘못된 안내와 함께 시작됐고, 관련된 기관마다 무능과 부패를 드러내며 “정부를 못 믿겠다”는 공감대로 이어졌다. 초기부터 튀어나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각종 음모론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한쪽에서는 세월호 주인이 국가정보원이라거나 잠수함 때문에 침몰했다는 설(說)을 생산했고, 다른 쪽에선 유가족들이 돈 때문에 저런다는 식의 루머를 퍼뜨렸다.
대통령이 다시 팽목항에 갔으면
왜 이념과 음모가 끼어들었을까. 혹시 우리가 방조했던 건 아닐까. 학생 수백명이 배와 함께 가라앉는 모습은 TV로 생중계됐다. 이를 지켜본 온 국민이 트라우마를 겪었다. 희생자들에 대한 마음의 빚이 너무 무거워서, 슬픔과 고통이 너무 커서, 이제 그만 잊어버릴 명분이 필요해서 저런 갈등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를 우리가 슬쩍 내준 것은 아닌가.
아마 이밖에도 여러 요인이 복합돼 있을 것이다. 핀셋으로 환부를 찾아내 도려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풀어야 한다. 단추를 잘못 꿰었을 때는 다 풀고 새로 꿰어야 제대로 입을 수 있다. 지금의 갈등과 분열은 1주기를 넘긴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치유하지 못하면 다음 재난이 닥쳤을 때 또 그러게 된다.
대통령은 다시 팽목항에 가야 한다. 아직 그 안에 사람이 있다. 1년 전 그랬던 것처럼 현장에 찾아가 함께 슬퍼하고 미안해하고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다. 앞으로도 이 문제를 놓고 계속 실패할 것인가. 이 잔인한 4월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
태원준 사회부장 wjtae@kmib.co.kr
[태원준 칼럼] 세월호, 왜 이 지경이 됐나
입력 2015-04-09 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