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신문에 연재도 하던 번듯한 만화가였다. 그랬던 A씨의 삶은 아내와 이혼하고 급격히 망가졌다. 알코올 중독 치료 시설을 전전한 지 올해로 20년이 됐다. 삶은 끝없이 추락했다. 뒤돌아봤을 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빈 술병과 망가진 몸이 전부였다.
겨우 입에 풀칠하듯 먹는 식사와 쪽잠, 거리생활은 간경화 당뇨 등 복합 질환을 불러왔다. A씨는 2002년 서울 동대문구 다일천사병원을 찾았다. 무료로 진료해준다는 말에 들렀다가 내과전문의 최영아(45·여)씨를 만났다. 그 뒤로 A씨는 해마다 한두 번 같은 질병으로 최씨를 찾는다.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전국 노숙인 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만2000여명이다. 주거 취약계층까지 더하면 26만명을 훌쩍 넘는다. 이들은 지하철역, 고시원, 길거리, 쪽방촌, 그리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고 돈다. ‘회전문’ 같은 삶을 산다. 그 회전문에서 빠져나와 노숙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현실은 이들을 그 안에만 머물게 한다. 막상 나가려 해도 갈 곳이 없다.
이런 노숙인들에게 최씨는 ‘슈바이처’로 통한다. 2001년 다일천사병원을 시작으로 2004년 서울 영등포구 요셉의원, 2009년 용산구 다시서기의원을 거쳐 2013년 지금의 은평구 도티기념병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노숙인 등 사회 취약계층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는 병원만 15년째 찾아다니고 있다.
노숙인을 처음 만난 건 1990년 학교 선배들을 따라 나갔던 무료 급식봉사에서였다. ‘저들이야말로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내과를 선택한 이유도 노숙인들을 더 자주 만나기 위해서였다. “수술이 많은 다른 과들은 수술해야 할 상황이 아니면 (노숙인을) 만나기 어렵잖아요. 내과는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계속 관리해야 하니까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그렇게 그들의 ‘회전문 삶’ 속으로 들어갔다.
최씨 인생의 멘토는 ‘쪽방촌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요셉의원의 고(故) 선우경식 원장이다. 선우 원장에게 육체적 질병 너머에 있는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지 배웠다고 한다. “인생 선배로서도, 의사 선배로서도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걷고 계셨던 분이에요.” 그는 선우 원장을 이렇게 추억했다. ‘쪽방촌 슈바이처’의 제자는 그렇게 더 낮은 곳을 찾아가 ‘노숙인의 슈바이처’가 됐다.
노숙인들은 거리를 전전하다 중간 중간 병원을 찾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는 악화되고, 결국 세상과 이별을 한다. 최씨는 2004년 겨울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불과 1년 전 자신에게 진료 받았던 노숙인 이영식씨가 길에서 동사한 채 발견됐다는 소식을 경찰로부터 들었다. 가족이 없는 이씨가 갖고 있던 유일한 연락처가 최씨 전화번호였다.
최씨가 만나온 환자는 일반 병원에 갈 수 없는 건강보험 적용 제외자들이다. 건강보험 카드도, 병원비 지불 능력도 없다. 대부분 A씨처럼 가정이 무너지며 노숙에 내몰린 경우였다.
최씨는 “가족 붕괴가 먼저인지, 노숙이 먼저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거리로 나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어 “‘가족관계 단절+인간관계 단절=노숙’이라는 공식은 대부분의 노숙인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문제”라고 덧붙였다.
노숙인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고 최씨는 진단한다. 가족관계 단절을 겪고 있는 사람은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현재 노숙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앞으로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늘어나는 1인 가구, 방치된 독거노인, 끊이지 않는 가출 청소년 등 ‘가족 해체’는 노숙인 문제를 우리 사회 안으로 깊게 끌어들이고 있다.
최씨는 정말 필요한 것은 ‘집(house)’이 아니라 ‘가족(home)’이라고 강조했다. 가난하더라도 가족관계가 남아 있는 사람은 질병 치료를 위한 접근이 쉬웠다고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면서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새롭게, 아프게, 그리고 깊게 느꼈다”며 “사람의 상처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치유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쪽방촌의 슈바이처’ 제자 ‘노숙인의 슈바이처’ 되다… 도티기념병원 최영아 과장의 ‘仁術 전수’
입력 2015-04-07 0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