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미국의 명문, 예일대와 뉴욕의대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잘 나가는 의사로서 상위 1%의 삶을 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1885년 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이어 헤론 가족과 함께 한국 선교의 문을 열었던 개척자,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1856∼1922·한국명 시란돈).
동료이자 협력 선교사로
스크랜턴의 순종엔 어머니 메리 플레처 벤턴 스크랜턴(1832∼1909)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국의 개척 선교사로 나가도록 설득한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53세의 나이에 아들과 함께 미국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 개척선교사로 나와 77세로 별세하기까지 선교사들에게는 ‘어머니’로, 한국 교인들에겐 ‘대부인’으로 통하며 이화학당과 공옥여학교, 부인성경학원 등을 설립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들 모자(母子)는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제자의 길’(눅 14:33)을 걸었다. 모자가 함께 선교사로 나온 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선교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희귀한 경우였다. 어머니와 아들은 때로는 같은 공간의 동료로서, 때로는 다른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추진하면서 서로 힘을 실어주는 협력 선교사로서 본을 보여주었다.
스크랜턴 모자가 서울 상동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수원과 평양, 원산 지방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주변 선교사나 한국인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에서 은혜를 받았다.
아들은 육으로만 아니라 영으로도 효자였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의료 선교사였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웃을 찾아 진료와 복음전도 사역을 감당했다. 내한 직후 소외계층이 주로 거주하는 서울 변두리로 병원(시약소)을 옮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시약소뿐 아니라 서울 아현교회와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수원종로교회, 여주중앙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스크랜턴은 어머니에 비해 기억하는 이가 적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와 연세대, 헤론은 남대문교회와 세브란스병원 설립(공로)자로서 역사적 평가와 인정을 받고 있지만 스크랜턴은 그렇지 못했다. 그나마 어머니 스크랜턴은 이화여고와 이화여대로 인해 기억하는 이들이 많으나 아들 스크랜턴은 그가 속한 감리교회에서조차 잊혀진 존재가 됐다.
잊혀진 아들 스크랜턴의 무덤은
왜 그렇게 됐을까. 그 답은 그의 무덤자리에서 풀 수 있다. 그가 묻힌 곳은 고향 미국 뉴헤이븐도,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도 아니었다. 그의 무덤은 미국도 한국도 아닌 제3의 국가, 일본에 있다. 고베. 거기서 윌리엄 스크랜턴은 홀로 잠들어 있었다. 일본은 그가 한국 선교사로 오기 전 두 달간 머물렀던 곳이었다.
1907년 선교사직을 사임한 이후 스크랜턴이 죽음에 이르렀던 마지막 15년의 삶은 고독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개척 선교사로서 한국 선교 현장에서 관리하는 장로사였음에도 선교정책과 방법론을 둘러싸고 직속상관인 해리스 감독과 갈등과 불화를 빚었다. 게다가 동료 선교사들의 지지도 얻지 못해 결국 사임하고 감리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윌리엄은 1909년 그렇게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했던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후에도 요양소와 병원 사업을 하면서 한국에 남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업이 여의치 않아 뜻을 이룰 수 없었고 결국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거기서 외로운 최후 5년의 삶을 보냈다. 그는 고베 외국인촌이었던 야마모토도리에 살면서 미국 영사관 고문 의사로 일하는 한편 외국인 국제병원 고문의사로 근무했다.
그의 시련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해 1년여를 투병하던 중 폐렴이 겹쳐 1922년 3월 별세했다. 미국정부 외교관이었던 사위의 권총 자살 소식을 들은 지 한 달 후였다. 그는 쓸쓸히 임종을 맞았다.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외로운 존재였다.
스크랜턴 모자가 던지는 메시지
올해는 한국 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바라기는 개척선교사로 스크랜턴 모자가 낯설고 열악한 환경의 조선 땅을 찾았을 때 품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꿈’이 오늘 이 땅에 다시 부활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꿈이 위기와 한계, 좌절과 실망에 사로잡힌 오늘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으로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선교 130년 만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해 숫자와 외형에서 부흥을 이뤘다지만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복음 특유의 겸손과 섬김, 희생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스크랜턴의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과 사랑이 더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크고 높게 지은 교회당 건물과 물질적 부유함, 육체적 편안함이 믿음의 결과라고 착각하는 오늘 한국교회에 스크랜턴, 그 어머니와 아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밝은 곳만 보지 말고 어두운 곳을 살피라. 힘세고 큰 사람만 쳐다보지 말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도 귀하게 여기라.
이것이 ‘여리고 골짜기’ 같았던 조선 땅을 찾아와 가난과 죽음의 절망에 사로잡힌 생명을 살려내고 혈통과 종교가 달랐던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해 이웃으로 만들었던 선한 사마리아인 스크랜턴의 마음, 그리고 실천이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이덕주 교수 약력=서울대 철학과(종교전공 수료)와 감신대 대학원(신학석사, 신학박사)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감신대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한반도평화통일신학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스크랜턴, 어머니와 아들의 조선 선교 이야기’ 등이 있다.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 선한 사마리아인 꿈을 안고 오다
입력 2015-04-07 0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