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지난 시간을 뒤돌아봤다. 젊은 날,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그런데 정작 시도하려고 하면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꿈 많은 20대 초반, 집에서 나와 청파동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좁은 방에 살면서 꿈 때문에 갈등만 하고 지냈던 그때가 기억난다. 매일 숨을 몰아쉬며 언덕길을 올라갈 때면 그 길이 마치 내 인생처럼 느껴졌다. 한밤중에 답답하기만 한 좁은 방을 빠져나와 서울 중구청 쪽을 바라보면 도심을 비추는 환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내일은 저 불빛처럼 내 인생도 빛으로 가득 찰 수 있겠지’ 하고 꿈꾸며 기도했었다.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가장 아프고 힘겨웠던 순간들, 지금은 마음에 굳은살이 되어 어떤 일도 이겨낼 디딤돌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해 겨울, 어린 나를 두고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나셨다. 그 후로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다. 대학을 들어가서는 독학하며 어렵게 한 계단씩 올라갔다. 너무 가진 게 없어서 가난하다는 표현마저 사용하기 어려웠던 청년의 시절,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게 해달라고 목이 쉬도록 기도했었다. 화요일은 청계산 바위에 서서 철야하고 금요일은 교회에서 철야하며 간절히 기도했던 기도 제목들,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꿈들이 40대에 다 성취되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다. 또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바,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날 때(신 1:19) 하나님은 항상 먼저 가셨고(신 1:30)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다고(신 1:31) 회고한 내용 그대로 나의 지난 삶이 그랬다.
시카고에 거주하면서 크리스천 재정전문가로서 사역하고 있는 김모 장로님과 오랫동안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분은 인생에서 여러 풍랑을 만났지만 믿음으로 극복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다. 한 번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 하나를 말해주겠다며, 지갑에 있는 작은 메모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거리에서의 새벽 시간을 기억하자’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그분에게도 가장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아내는 아프고 돈은 떨어졌는데 일할 곳마저 없었다. 절망의 골짜기에 빠져 헤매던 그 순간은 죽음마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그 시간을 통과한 덕에 이제는 성공한 한 남자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에서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 바로 가장 절망스러웠던 순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때를 기억하기 위해 메모하여 지갑에 넣고 다닌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이뤄진 많은 감사의 내용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란다. 나이가 들면서 남들보다 더 좋은 차와 더 넓은 집, 여유로운 재정 상태, 자신의 진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자녀들, 건강한 가족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감사의 열매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도 그때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반대로 잘될 때에도 그때를 생각하면서 감사한다고 한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의 기쁨과 은혜는 없다. 누구에게든 인생의 깊은 고난의 골짜기를 건너야 할 순간들이 온다. 고난주간에 동참하기 위해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고난의 시간이 주어질 때가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한다(롬 9:1∼2). 근심과 고통 없이 사는 남자들이 없다. 자신 안에 있는 거친 욕망과 다투며 살고, 나를 무너뜨리려는 대적들과 맞서 살며,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근심과 고통을 이기는 능력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다. 또한 지나온 날들을 은혜 가운데 감사하며, 내일을 확신 가운데 소망하는 것이다(롬 8:28).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감사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앞으로도 계속 더 많이 갖겠다는 생각보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한 감사부터 챙겨보자. 나이만큼 커지는 것이 욕심이라고 한다. 욕심은 의욕과 희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칫 ‘욕된 마음’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주변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도 살펴보자. 외롭고 힘들 때 누군가 손 한 번만 잡아줘도 희망이 생기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내 인생에 가장 어려운 시간이 내게 새겨준 감사가 있다. “청파동 언덕을 오고 가던 그 시절을 잊지 말자!”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오늘이 참 행복해진다.
이의수(사랑의교회 사랑패밀리센터·남성사역연구소장)
[이의수 목사의 남자 리뉴얼] 오늘이 행복한 이유
입력 2015-04-04 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