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희생양

입력 2015-04-04 02:07

희생양 이론은 가족치료를 태동시킨 중요한 가족관계 이론 중 하나다. 가족 중 한 명이 심리적인 병을 앓는 환자라고 하자.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생활을 잘 하고 있다. 그런데 환자 하나가 병에서 나아지니까 희한하게 다른 가족들의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다른 가족들은 나름 자기 생활을 유지하고 환자는 다시 증상이 나빠진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희생양 이론’이다. 이러한 가족은 자신들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관계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들을 모두 다 환자 탓으로 몬다. 환자가 회복하면 다른 가족이 문제를 짊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어서 다시 희생양인 환자가 모두 감당하도록 상황을 만들어간다. 가족치료에서는 ‘환자’에 대해 ‘환자로 지정된 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희생양 이론에 맞는 가족의 경우 이러한 용어가 잘 들어맞는다.

이 글이 게시되는 토요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날과 부활하신 날 사이에 있는 하루다. 두 어마어마한 사건 사이에 있는 특별한 이 날은 한없이 조용한 날이다. 당시로 치면 안식일이니 예배 외에는 다른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은 이 날이 어떠했을까? 인생의 모든 것을 예수에게 걸었던 사람도 있을 텐데 예수는 어제 처참하게 사형을 당했다. 총독에게 민란 가능성으로 위협하여 예수의 죽음을 얻어낸 지도자와 일반인들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과 동족이면서 민족의 안정과 유대교의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러한 정통성을 가장 잘 상징하는 날인 안식일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제사와 예수의 죽음을 연결시킨다. 8장까지는 대제사장과 예수를 연결시킨다. 그런데 9장부터는 제물과 예수를 연결시킨다(히 9:26∼28). 예수는 대제사장이지만 동시에 제물로 자기 몸과 피, 즉 생명을 내어주었다. 굳이 그런 연결이 아니라도 예수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발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정치적인 시각으로 보면 예수는 파벌 싸움의 희생자다. 예수가 가는 곳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에 비해서 열세인 것이다. 예수가 섰던 줄은 기득권의 눈 밖에 나서 내침을 당하는 사람들이 서는 줄이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우리는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이유는 내가 편하기 위해서이다. 나의 문제를 투사하여 던져버리고 나는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만만한 사람을 선별하고 그에게 모든 문제를 전가한다. 희생양은 억울할 것이나 반항할 힘조차 없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조롱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는 희생양을 탓하면서 악독한 매질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더 악랄해진다.

그렇게 보자면 예수님은 희생양 중의 대표인 셈이다. 가장 약하고 억울한 피해자의 상징이시다. 서열에서 밀리고 누명을 쓰고 구명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약자이다.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우리는 희생양 이론에 걸맞게 그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가 ‘오늘’이다. 내일은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그 내일이 당신의 것이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