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컴퓨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무장한 간첩을 50여년 된 증거법으로 잡으라는 건 난센스다." 공안수사 경력이 많은 한 검찰 간부는 최근 증거법 중 핵심인 형사소송법 313조를 두고 푸념했다. 이 조항은 가령 피고인의 컴퓨터에서 혐의 관련 문건이나 녹취록이 나와도 "내 것이 아니다"라고 부인하면 그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법정에서 불리한 정보는 무조건 부인하는 피고인도 많아졌다. 검사들 입에서는 "증거법 하나 고치는 게 다른 법조항 100개 손대는 것보다 낫다"는 말까지 나온다.
대검찰청 공안부가 1961년 개정된 뒤 한 차례도 바뀐 적이 없는 증거법 개정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해 11월부터 공안부를 중심으로 증거법 연구모임을 진행해 그 결과 보고서를 올 초 대검에 올렸다.
검사들은 디지털 정보의 증거능력을 작성자 진술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대검은 조만간 검토·보완을 마치고 법무부에 제출해 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증거법은 증거의 종류·범위에 관한 형사소송법 조항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디지털 증거’는 컴퓨터 파일, 이메일, SNS·인터넷 게시물 등 디지털 매체로 작성된 증거물을 말한다.
◇“피고인 동의 없으면 증거로 못 쓴다”=디지털 정보의 증거능력이 처음 문제가 됐던 것은 98년 ‘영남위원회’ 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영남위원회 간부들의 플로피 디스켓을 압수해 저장돼 있던 이적성 문건을 증거로 제출했다. 영남위원회의 반국가단체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문건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문건 작성자로부터 “내가 작성한 것이 맞는다”는 확인을 받지 않아 증거로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검찰이 공안사건에서 매번 맞닥뜨리는 문제도 여기서 발생한다. 검찰의 한 고위 간부는 2일 “피고인 컴퓨터에서 나온 이적 문건도 당사자가 잡아떼면 증거가 되지 못한다. 차라리 자필 메모라면 필적감정이라도 해보겠지만 디지털 문건은 그럴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2000년대 들어 대표적 공안사건인 ‘일심회’ ‘왕재산’ 사건 때도 법원은 같은 이유로 일부 핵심 문건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불법 댓글’ 사건 때도 국정원 직원들은 자신들의 이메일에서 나온 각종 파일에 대해 ‘모르쇠’ 전략을 썼다.
간첩사건에서 종종 증거로 제출되는 ‘북한 지령 문건’ 같은 경우 검찰로선 더 난감해진다. 북한에 있는 문건 작성자를 우리 법정에 증인으로 세울 방법조차 없기 때문이다.
◇돌파구 찾는 검찰=대검에 제출된 증거법 연구모임 결과 보고서에는 작성자의 시인 외에도 디지털 정보의 증거능력을 인정받는 각종 방안이 제시돼 있다. 디지털 정보는 변형·조작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증거능력 입증에 엄격해야 한다는 데는 검찰도 동의하지만 작성자의 진술 여부만이 판단 준거가 되는 현 상황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검찰은 디지털 정보의 작성자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제삼자의 증언도 고려돼야 한다고 본다. 증거로 제출된 디지털 파일의 생성·처리·보관 과정을 알고 있는 이가 해당 정보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증언하는 방식이다. 또 증거능력이 인정된 다른 디지털 정보와 그 특성을 비교해 보는 방법도 있다. 파일에 입력된 암호가 동일한지, 문건의 외양이나 내용, 내부적 패턴에서 독특한 특징이 반복되는지 등을 살피는 방법이다. 문건의 내용과 피고인의 행동에 연관성이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방법들은 이메일과 SNS,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인터넷 게시물 등 각종 디지털 증거들의 인정 기준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다양한 객관적 입증 방법을 열어두되, 법관이 증거능력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식으로 증거법을 개정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노명선 교수는 “당시 논의 대상에서 빠졌던 부분인데, 디지털 정보가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는 만큼 관련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현수 이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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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정보’ 증거능력 강화 추진-기획] 檢 “50년 넘은 증거법으론 간첩 못 잡는다”
입력 2015-04-03 0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