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容恕)라는 단어를 한자로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얼굴 용(容)과 용서할 서(恕)인데, 여기서 ‘서’라는 한자의 뜻은 이렇습니다. 전통적으로 주자가 해석한 내용을 따르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여심(如心), 마음의 높이를 같이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상대의 얼굴, 상대의 마음과 높이를 같이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용서란 상대가 있는 것이고, 그 상대의 처지와 형편에 공감할 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 용서의 상대는 누구인가요. 우선은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로마의 군인들일 것입니다. 또 그들의 배후에 있는 빌라도, 빌라도의 배후에 있는 로마 황제, 그들의 조종에 놀아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용서의 대상일 것입니다. 그들뿐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용서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고의로 그랬든지, 주님에 대해 무지해서 그랬든지, 이해관계가 달라서 그랬든지, 일신의 안일과 게으름 때문에 그랬든지 주님의 고통과 죽음에 무관심한 모든 사람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우리도 포함됩니다. 문제는 어떤 이유로 포함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 묵상할 일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자식의 유괴범을 용서하지 못해 고통 중에 살던 주인공은 신앙에 귀의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그런데 면회 가서 만난 유괴범은 평안한 얼굴로 “나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내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누가 용서를 한다는 것인가’라며 주인공은 절규합니다.
그 유괴범은 분명 용서를 잘못 알았습니다. 자신은 참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에 대한 보상과 치유와 화해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며 평안히 있는 그 세월 동안, 피해를 당한 사람은 지옥의 고통 가운데 있었는데 어떻게 용서가 가능한가요. 용서라는 단어는 마음과 마음, 얼굴과 얼굴이 같은 높이에, 같은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의 용서, 용서받음은 없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평생 간직할 만한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공자는 한 글자 ‘서(恕)’를 말했습니다. 최근 일본과의 관계에서 이 한 글자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퇴행을 거듭하는 과거사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법관들에게 그렇습니다. 정의나 다른 덕목에 앞서 ‘서(恕)’ ‘여심(如心)’ ‘마음의 눈높이를 같이하는 자세’를 권하고 싶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용서가 있는 곳은 드뭅니다. 사회 어디에서나 되풀이되는 ‘밀양의 비극’ ‘용서의 오해’까지 용서되는 2015년의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연석 목사(여수중부교회)
[오늘의 설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입력 2015-04-03 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