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은 흑인과 동양인보다 훨씬 추위를 잘 견딘다고 한다. 미국과 유럽의 주택들 대부분이 온풍기 외에 별다른 난방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다.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에는 백인 외교관들이 자주 찾아온다. 우리 관리를 만나면 보통 한두 시간씩은 청사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표정은 묘하다. 바깥에서 보면 첨단 빌딩처럼 보이는 이곳이 왜 이리 춥냐는 것이다. 입고 온 외투를 벗기는커녕 옷깃을 더 세워야 하는 장소가 바로 외교부청사다.
외교부청사는 2000년대 초반에 완공됐다. 그 이전엔 정부서울청사에 총리실 외교부 교육부 통일부 여성가족부 행정자치부 등이 한꺼번에 입주해 있었다. 외국사절이 와도 제대로 접견할 장소도 없던 차에 김대중정부가 외교부청사를 따로 지었다. 건물은 지금 봐도 설계가 훌륭하다. 중앙에 중정(中庭)이 뚫려 있어 지하 4층 주차장까지 햇빛이 든다. 유리창도 적절하게 배치돼 채광과 에너지 소비를 줄이도록 했다. 적당히 실내온도를 유지하면 환기가 자동으로 이뤄지는 이른바 ‘인텔리전스빌딩’이다.
그런데 이 청사가 지어진 지 40년도 넘은 바로 옆 정부서울청사보다 더 애물단지다. 겨울에는 훨씬 더 춥고, 여름에는 훨씬 더 덥기 때문이다. 예전 방식으로 설계된 정부서울청사는 문만 꽁꽁 닫으면 덜 추운 겨울을 보낼 수 있다. 반면 외교부청사는 아무리 문을 닫아도 차디차기 이를 데 없다. 넓게 공간을 배치한 설계 탓이다.
외교부 공무원들의 겨울나기도 진풍경이다. 책상마다 오리털파카가 걸려 있고, 무릎담요도 한두 장씩 갖춰져 있다. 출근하면 ‘얇은’ 코트를 벗고 훨씬 ‘두툼’한 실내용 외투를 걸친다. 담요로 다리를 감싼다. 이렇게 중무장을 해도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3월은 더 심하다. 꽃이 피고 햇볕은 따뜻해지는데 체감온도는 겨울만큼 춥다. 그나마 겨울에는 조금씩 틀어주던 난방도 이때부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알고 보면 겨울만 고역은 아니다. 여름이 되면 정말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선풍기 바람은 뜨겁기 이를 데 없는 계절이 공무원들의 여름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김대중·노무현정부 때만 해도 안 그랬다. 많은 전력을 쏟아 붓지 않고도 이 청사는 쉽게 난방이 되고 쉽게 냉방이 됐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정부 들어 실내온도 규제가 시작됐다. 처음엔 전력수급 차질 현상이 발생할 때만 잠깐 정부청사 냉난방이 멈추더니 이제는 아예 ‘겨울에는 무조건 춥게, 여름엔 무조건 덥게’로 고착됐다. 이렇게 첨단 인텔리전스빌딩 외교부청사는 ‘먹통’이 됐다.
비단 외교부청사만이 아니다. 공무원들이 일하는 곳의 환경은 똑같은 실내온도가 적용된다. 사기업이라면 노동조합이 나서서 “열악한 근무 환경에선 일 못 한다”고 난리를 쳤을 법하지만 공무원들은 잠잠하다. 나라의 녹(祿)을 먹고 사는데 ‘나랏님’의 방침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순 없으니까 그렇다.
거의 매일같이 출근해 일해야 하는 직장에서 겨울엔 하루 종일 떨어야 하고, 여름엔 하루 종일 땀을 흘려야 하는 게 공무원들 신세다. 그러니 이들에게 제일 좋은 계절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4, 5월과 9, 10월밖에 없다. 짧아도 너무 짧은 봄과 가을 말이다.
지난해 여름 한창 더웠던 어느 날 한 고위직 공무원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무원이란 존재를 업무 효율은 전혀 필요 없는 존재로 보는 게 아닌지 참….”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
[세상만사-신창호] 이상한 외교부청사의 사계절
입력 2015-04-03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