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 정도의 고통은 겪고 삽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 전화했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가 말하는 ‘이 정도’는 건장한 20대 청년이 어느 날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정도’이다. 그는 안응호(54·강남중앙침례교회)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실장이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누구나 이보다 더하거나 덜한 고통을 견디며 산다. 이학박사인 그는 자기 고통을 ‘N분의 1’로 표현했다.
안 실장은 “이 지구에 72억여명이 살아가고 있고, 고통도 꼭 이 숫자만큼 ‘경우의 수’가 존재할 것”이라며 “가난이나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나. 내가 겪은 고통은 기껏해야 72억분의 1”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은 모두 각자의 고통으로 끙끙대지만, 예수는 인류 전체를 위해 십자가 지는 고통을 선택했다. 얼마나 위대하느냐”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휠체어 탄 싱글대디 ‘성우아빠’
2003년 미국 유타대에서 반도체 물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장애인 단체 활동가와 대학 시간강사로 일해 왔다. 최근 그가 일하는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총연맹 사무실을 찾았다. 책상 앞에 있던 안 실장은 능숙하게 휠체어를 돌려 손님을 맞았다. 훤칠한 얼굴이다. “난 할 얘기가 별로 없는데…”라며 탁자 앞에 자리 잡았다. 1987년 미 햄린대 재학 시절 난 사고부터 물었다.
“제 생일이 성탄절 직전인 12월 23일이에요. 여자친구, 후배와 함께 24일 오전 스키 타러 가던 길이었죠. 미끄러웠는지 도로 위에서 차가 ‘휙’ 돌았어요. 차체가 돌 때 후배 대신 제가 핸들을 잡은 게 마지막 기억이에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저는 차창 밖으로 튕겨 나갔죠. 등과 허리뼈 10개가 나갔죠. 간은 세 조각 나고….”
여자친구와 후배는 무사했다. 어머니는 사고 사흘 만에 입국, 아들 곁을 지켰다. 안 실장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를 따라 처음 교회에 나갔고 곧 여섯 살 터울의 여동생이 따라갔다. 중학교 다닐 무렵 아버지 고 안종하 장로와 어머니 손숙자(76) 권사도 교회에 출석했다. 사고 후 친척 중에는 “하나님 믿어도 아무 득 없다”며 교회를 등진 이도 있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장난꾸러기였고 시시한 농담하길 좋아했어요. 전 기억에 없는데 제가 사고 후 사흘째 되는 날 깨어나 간호사에게 ‘당신은 푸른 눈을 가졌군요(You have blue eyes, baby!)’라고 했대요(웃음). 제가 완전히 의식을 찾은 건 2주 뒤예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다면 못 살았을 거예요. 하루하루 살았어요. 사고 후 여동생이 ‘다같이 죽자’며 엉엉 울기도 했죠.”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휠체어를 타고 학교에 다시 나갈 때쯤 아들이 태어났다. 여자친구는 사고 당시 임신 3개월이었다.
“지인 중에는 자녀 출산을 만류한 사람도 있었어요. 나와 여자친구는 하나님 주신 생명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했습니다. 사고로 유산될 수도 있는데 아기가 무사히 태어났어요.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뜻으로 성우라고 지었어요. 영어명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려고 코리라고 했죠. 풀네임이 ‘코리-안’이 되죠.” 안 실장은 성우가 태어난 해 말 성우 엄마를 떠나보냈다.
헌병대 체포조에서 만난 하나님
그는 90년 학부 졸업 후 듀크대에서 신학을 잠시 공부하다 의대를 준비했다. “신학만이 하나님의 일이란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의학은 장애인이 된 제가 자존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선택했던 것 같아요. 듀크대와 에모리대 의대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학비가 부담돼 관뒀어요. 대신 96년 전액 장학금을 주는 유타대 석·박사 통합과정에 들어갔고 7년 만에 학위를 받았습니다.”
안 실장은 과거에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전 제 삶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미사여구로 표현하고 싶진 않아요. 고난과 고통은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저의 고통을 피할 방법은 없어요. 제 몫이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어요. 모든 것이 흘러갈 것이라고 믿고.”
자연과학 이론이 성경의 창조론과 길항하진 않았을까. “자연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천재 과학자 스티븐 호킹은 ‘자연의 진화 속도에 따라 인류가 현재의 평균 지능에 도달하려면 우주 창조 후부터 현재까지 시간보다 배의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적이 있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얘기죠.”
이 과학도는 82∼84년 군 복무 시절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키 182㎝, 몸무게 64㎏. 그는 탈영병을 체포하는 헌병대에 배치됐다.
“2인 1조로 사복을 입고 탈영한 병사를 찾아다니는 일을 했어요. 한번은 서울 남산 밑에 달동네에 탈영병을 찾으러 갔어요. 문을 열었는데, 악취가 훅 끼치면서 3.3㎡ 될까 한 방에 아이와 어른 일여덟명이 뒤섞여 누워 있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탈영하는 이유가 대부분 가족들 먹여 살리려는 거였어요. 가난해서. 그때를 생각하면….”
안 실장의 눈두덩이 붉어졌다. 금세 눈에 눈물이 맺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이 그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헌병은 허기진 가족들을 뒤로 하고 잡혀온 탈영병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했다. ‘하나님, 이 병사를 인도해주세요. 그의 가족을 지켜주세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마음이다. 직업 군인 아버지 덕에 큰 부족함 모르고 자란 그는 체포조에서 목격한 가난에서 예수 사랑을 배웠다.
얼굴 없는 ‘몸짓과소리’ 설립자
유학을 마칠 무렵 미국 대학 두 곳에서 교수직을 제안했다. “귀소본능일까요. 2003년 귀국했습니다. 어머니 연세도 많고. 국내 한 국책연구소에 지원했는데 탈락했죠. 제가 장애인이라는 게 부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해요.” 그는 시민단체에서 장애인 정책을 검토하고, 숭실대와 숙명여대 등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쳤다. 주어진 일에 전념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아들은 이때부터 혼자 미국 생활을 했다. 더 어릴 땐 어머니 손 권사가 미국을 오가며 돌봤다. “아들이 자립심이 강해요. 엄마 닮아서 머리도 좋은 것 같고(미소).” 현재 미 토머스제퍼슨대 생화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2008년 장애인과 소외계층의 문화예술 향유를 돕기 위해 사단법인 ‘몸짓과소리’를 설립했다. 몸짓과소리는 문화적으로 소외된 저소득층, 장애인, 다문화가정 아동 및 청소년들의 문화 참여사업과 예능 교육개발 지원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 단체다. 매년 장애 학생을 선발, 악기를 가르치고 장애인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갖고 있다.
몸짓과소리의 설립자이자 실질적 운영자이지만 그의 이름은 이 단체 홈페이지(happylog.naver.com/mands4all.do) 어디에도 없다. “제가 대표가 되거나 임원이 되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경험할 수 없잖아요. 더 많은 이들이 장애에 관심 갖도록 하는 방법이죠.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게 많아요. 예수님이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 것처럼.”
단체 급여와 강사비를 합해도 월평균 300만원 넘기기 어렵다. 수입의 약 3분의 1은 몸짓과소리 운영비로 쓰인다. “저희 어머니가 몸짓과소리 가장 큰 후원자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낸 몸짓과소리 운영비만큼 저희 어머니 생활비를 적게 드리게 되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고 한다. “제게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제가 장애인이 되지도 않았을 거고 장애인 정책을 고민하거나 몸짓과소리를 만들지도 않았겠죠. 어떤 고통이나 고난이 오더라도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을 주고, 여기에 맞는 사명을 주셨다.
내일은 2015년 부활주일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고난을 이기고 새 삶을 사는 것이 부활의 삶인 듯하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안응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실장 “7,200,000,000분의 1 휠체어 탄 고통… 십자가 예수 고통은?”
입력 2015-04-04 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