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목청 커진 檢·입 닫은 공정위… 20년새 기운 ‘힘의 무게추’

입력 2015-04-02 03:21

1996년은 공정거래위원회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해로 남아 있다. 공정위 현직 국장 등 3명이 기업체로부터 수천만원대의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나 구속됐기 때문이다. 공정위 일각에서는 당시 불공정행위 사건의 고발권한을 놓고 검찰과 갈등을 빚은 게 검찰 비리 수사의 발단이 됐다는 의혹을 갖고 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지금, 검찰과 공정위는 고발권한을 놓고 또 한 차례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그때와 다른 점은 검찰의 '비논리적인' 공격에도 공정위가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사 제대로 안 해놓고 공정위 탓만 하는 검찰=검찰은 지난 16일 공정위를 상대로 처음으로 검찰총장 명의의 고발요청권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입찰 담합을 저지른 SK건설에 대해 공정위가 행정처분(과징금)만 내린 데 대해 형사적 처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검찰이 공정위의 조사가 미진했다는 점을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일 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신학용 의원은 최근 10년간 공정위가 검찰에 고발한 347건을 분석한 결과 검찰이 정식재판을 청구한 사건은 61건(17.6%)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고발 사건 10건 중 8건은 약식기소 등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상당한 고발 건수가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고발돼 온다”고 불만을 표했다. 공정위가 공소시효가 임박해 사건을 넘겨줘서 수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댄 것이다. 하지만 1일 국민일보가 국회 정무위 소속 이상직 의원실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공정위가 검찰에 고발한 223건 중 고발일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1년 미만인 사건은 29건(13.0%)에 불과했다.

피고발인을 법인이 아닌 개인으로 좁혀 봐도 고발 조치된 156건 중 ‘1년 미만’ 공소시효 사건은 9건(5.8%)뿐이었다. 고발 대상 대부분이 법인이어서 약식기소(벌금형)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검찰의 논리와 상반되는 결과다. 이 의원은 “검찰이 지금까지 공정위 고발사건에 대한 소극적인 수사 관행을 인정하지 않고 공정위 핑계만 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검찰’은 옛말, 침묵하는 공정위=공정위는 검찰의 책임 ‘떠넘기기’에 침묵하고 있다. 오히려 신 의원실 보도자료가 배포된 것에 대해 검찰이 자료 출처가 공정위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하자 “우리는 언론플레이를 한 적 없다”며 해명에 급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 관계자들은 이후에도 하나같이 “검찰과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공정위의 소극적 대응은 90년대 초 고발권한을 둘러싼 검찰과의 갈등 경험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공정위가 90년대 초 식품 가공날짜를 위반한 백화점 등 유통업체에 대해 과징금만 부과하자 검찰은 이들 업체를 고발해 줄 것을 공정위에 수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고발할 사안이 아니라며 이를 모두 거부했다. 당시 불공정행위 사건은 공정위에만 고발권한이 주어져 있었고 검찰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두 기관의 긴장 관계는 수년간 지속됐지만 96년 검찰이 공정위 국장 비리사건 수사에 착수하면서 무게 추는 검찰 쪽으로 기울었다. 그해 공정위에 고발을 요구할 수 있는 고발요청권한이 검찰에 주어졌고, 이후 검찰의 고발요청에 공정위는 대부분 거부하지 않았다.

공정위 내부에서는 경제 민주화가 사그라지고 전속고발권마저 폐지된 마당에 ‘경제검찰’이란 표현마저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전속고발권이 있고, 4대그룹을 정조준해 조사하던 때나 경제검찰이었지 지금은 검찰의 위상에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캐시카우’된 기업 불공정 사건, 기득권 싸움 이제부터=공정위와 고발 협의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검찰은 왜 공개적으로 고발요청권을 행사했을까. 우선 검찰이 미국과 같은 경쟁법 처리 구조를 만들고 싶은 속내를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담합 사건의 경우 검찰이, 나머지 불공정행위 사건은 경쟁 당국이 맡는 분업화가 돼 있다.

검찰도 이번에 서울중앙지검에 공정거래조세조사부를 신설하고 이 부서의 첫 사건으로 공정위에 고발요청권을 행사한 SK건설 담합 사건으로 정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니언시(자진신고감경제도)에 의존하는 공정위의 담합 조사 관행 대신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권을 바탕으로 담합 사건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편으로는 법원과의 관련 법률시장의 기득권 싸움으로 볼 수 있다. 기업 불공정행위 사건은 대형 로펌들의 캐시카우(Cash-cow·현금출납기)가 된 지 오래다. 서울고법 공정거래 전담 재판부 출신 법관이 퇴임 후 수십억원의 수입을 올리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에 맞서 검찰이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세종=이성규 윤성민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