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 기억하시죠. 이 이야기의 실제 무대인 마을이 정부의 제2서해안고속도로 건설 추진으로 두 동강 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국내 여섯 번째 슬로시티로 지정되기도 한 이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얼마 전부터 강한 어조의 현수막들이 내걸렸습니다. 경기도 평택과 충남 부여, 전북 익산 139.2㎞를 잇는 제2서해안고속도로가 이곳을 관통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죠.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요구하는 이유는 자연환경과 전통문화 보존 때문입니다.
느린 삶·진정한 행복을 찾는 현대인의 안식처
2009년 9월 국제슬로시티연맹이 국내 6번째로 지정한 충남 예산 대흥슬로시티는 느린 삶과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현대인의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느림의 상징인 달팽이를 내세우며 조금은 천천히 느림의 행복을 찾아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제2서해안고속도로 1단계 구간(평택∼부여 86.3㎞)은 이곳을 지나게 돼 있습니다. 주민들은 이렇게 되면 어렵게 지켜온 마을 내 역사유적들과 자연환경,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마을의 정체성이 모두 훼손된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예당저수지와 우리나라 청동기 유물 발굴 유적지, 백제 부흥군의 최후 항전지인 임존성, 조선 초기의 관아 건축물인 대흥동헌, 조선 태종 때 설립된 대흥 향교, 의좋은 형제의 실존인물인 이순·이성만 형제의 우애비 등 보존이 필요한 문화유산이 많습니다.
고속도로 건설로 ‘의좋은 형제’ 두 동강 날 위기
1일 오전 이 마을에서 만난 박효신(68) 대흥슬로시티협의회 사무국장은 주민들 스스로 아름답게 가꿔 국내 최고의 슬로시티로 자리 잡은 마을을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마을에 고속도로가 지나가면 슬로시티(Slowcity)가 아니라 패스트시티(Fastcity)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슬로시티는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잘 보존된 지역에 국제슬로시티연맹이라는 국제기구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인증해 주는 곳입니다. 대흥슬로시티는 2009년 9월 4일 국내 6번째, 세계 121번째로 인증을 받아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한국형 슬로시티 성공모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에는 5년간의 성과와 실적을 높이 평가받아 재인증을 받았죠. 세계가 이 마을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곳으로 인증해 준 것입니다.
박 사무국장은 이런 곳을 국가가 보호하고 격려하지 못할망정 주민들이 이뤄놓은 살기 좋은 마을을 포크레인으로 뭉개려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2013년 농림수산식품부가 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한 곳인 대흥면에 고속도로가 통과한다면 국제적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며 정부와 건설사에 노선 변경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포스코건설이 민간투자 방식으로 제안해 최근 정부의 적격성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포스코건설은 4월까지 총사업비 2조1600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제안서를 제출할 계획입니다.
경제적 논리 VS 천년문화 보존
건설사의 제안대로 봉수산과 예당저수지 사이를 통과하는 노선이 그대로 추진된다면 50여년 전 예당호 조성 과정에서 땅과 집 등을 내놓고 이주했던 주민들이 다시 한번 터전을 내놓고 거주지를 옮겨야 합니다. 지역 주민들은 업체가 경제적 논리보다는 백제시대 이후 천년이 넘는 동안 전해 내려온 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스코 측은 마을을 우회하면 수백억원이 더 소요되는 만큼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슬로시티 주민들의 요구대로 고속도로를 우회하면 700억∼800억원의 공사비가 추가로 들어간다는 거죠. 하지만 주민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포스코가 수익사업을 위해 예당저수지에 휴게소 건립을 고집한다고 의심합니다. 예정된 노선을 지나야만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휴게소를 지을 수 있다는 거죠.
예산군은 이미 고속도로 노선 변경안을 제출했습니다. 봉수산 앞을 지나는 노선도를 수정하면 자연환경과 역사 문화재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노선도를 막겠다고 합니다. 시멘트 기둥을 박기 위해 마을을 헤집어놓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겁니다. 50년 전 이미 예당저수지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경험이 있는 주민들은 두 번 다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2서해안고속도로 노선 변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고속도로 통과를 저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오는 5월 사업시행자를 최종 결정하고 시행자와 함께 최종 노선을 협의할 계획입니다.
“동화 속 마을 지키고 느린 삶 살겠다”
주민들은 슬로시티 조성에 적극 참여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전통문화 복원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첫 사업으로 2011년 예당저수지 조성과 함께 사라진 대흥장터를 40년 만에 ‘의좋은 형제장터’로 부활시켰습니다. 장터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대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로 소개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애 좋은 두 형제는 봄과 여름 함께 일해 가을에 풍년을 맞게 되는데 형은 새 살림을 꾸린 아우를 위해, 아우는 가족 수가 많은 형을 위해 서로가 서로의 집에 볏단을 가져다줬다는 훈훈한 전래동화입니다. 이 이야기가 시작됐던 곳이 바로 대흥입니다.
예산군과 당진군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63년 완공된 예당호는 중부권 최대의 저수지로 서울 여의도 전체 면적(8.4㎢)보다 더 큰 9.9㎢이고 둘레는 마라톤 풀코스와 맞먹는 40㎞에 달합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거죠.
3개 코스로 조성된 스토리텔링 로드인 ‘느린 꼬부랑길’도 선보였습니다. 이 길은 슬로시티가 지니고 있는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문화, 역사, 전통, 생태, 공동체를 접목시켰습니다.
지난해 4월 개관한 달팽이 미술관은 드라마 세트장으로 이용됐던 옛 보건지소 건물을 슬로시티에 걸맞게 미술관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슬로시티의 상징인 달팽이를 이름에 넣었습니다. 미술관에서는 주민의 사진전, 대흥병원의 역사물 등을 전시하는 첫 기획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었는데 경제논리에 따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문화유산, 자연환경을 훼손해도 될까요?” 박 사무국장이 정부와 건설사에 묻는 말입니다.
예산=글·사진 홍성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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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뉴스] 느림의 행복 슬로시티에 마을 관통해 고속도로를?
입력 2015-04-03 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