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춘 (8) 3번의 위기로 단련… 1998년 IMF 사태가 기회로

입력 2015-04-03 02:01
사업이 다시 안정된 1994년, 이상춘 이사장이 모처럼 가족여행을 떠났다.

사업 규모가 커지고 안정되면서 나는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회사의 현금보유 비율을 늘리고 위기가 오더라도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의 어려움을 세 번이나 경험했던 터라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저항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찬찬히 돌이켜보니 희한하게도 정확히 6년마다 위기가 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0년 유류파동, 1986년 석탄산업 퇴조, 1992년 노사분규로 인한 자동차산업의 위기였다. 다시 내가 수입대리점과 인천 남동공장을 가동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중에 6년이 지났다. 이번엔 그냥 지나가나 했지만 역시 6년이 지난 1998년, 빨간불이 들어왔다. 온 국민이 뼈저리게 기억하는 IMF사태였다.

나라가 부도가 난 이 암울한 상황에서 외국의 기업사냥꾼들은 알토란같은 우리 회사들을 싼값에 집어삼켰다. 중공업 중장비 조선소 제약회사 등에 지분율로 경영에 참여하면서 나중에 엄청난 이익금을 챙겨가게 됐다.

나는 어렵기는 해도 이미 고생했던 경험 때문에 상황이 닥칠 것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따라서 IMF를 준비하지 못하다 속절없이 당한 다른 회사들과는 달랐다. 1992년의 악몽이 부채 비율을 낮추게 해 나를 잘 단련시켜 주었던 것이다.

당시 은행에 넣으면 받을 수 있는 이자가 연 24%였고 달러당 원화가 2000원이 넘기도 했다. 중소기업들은 높은 금리 때문에 대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를 보다 못한 정부가 중소기업 육성책으로 저금리 대출을 기업에 해주어 우리 회사도 4억원을 빌렸다. 나는 내가 들었던 적금도 다 해약하고 현금동원력을 최대한 늘렸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것이 역으로 회사를 키우는 촉진제가 되어주었다.

난 지금도 아찔한 것이 있다. 1992년 위기 때 은행과 어음의 무서움을 배우지 못했다면 IMF사태 때 우리 회사는 볼 것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난 갖고 있던 현금과 또 지원받은 돈으로 같은 업계 경쟁사를 인수·합병했다. 나보다 훨씬 크게 사업했던 공장들이 내 소유로 등기가 되었던 것은 정부가 기업 경매를 받으면 이 중 90%를 대출해주는 제도가 막 생겨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당진(6000평)과 안산(1200평)에 연이어 공장과 부지를 인수할 수 있었다. 사실 준비를 잘하고 있어서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 회사는 큰 규모의 회사로 성큼 성큼 도약했다. 2000년 20억원 매출을 처음 돌파한 뒤 매년 매출이 100억원 정도씩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우리 회사가 만드는 패드 스프링은 나중에 자동차 부품 시장의 80%를 차지할 만큼 커졌다.

어느 날 내게 이렇게 쏟아지는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이 분명한데 “왜 이렇게 부어주실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불현듯 내가 자살 직전의 상황에 눈물 흘리며 주님께 서원한 말이 뇌리를 스쳤다.

“주님. 이 위기를 막아주시면 100억원대의 장학재단을 만들겠습니다.”

순간 하나님과의 이 약속을 더 미루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내 나이가 한창이고 아직 사업할 일이 멀지만 시간이 항상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여겼다. 내가 고등학교 학비가 없어 눈물 흘리며 서울로 올라오는 아픔을 겪었던 것처럼 오늘도 학비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