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춘 (12)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孝 실천

입력 2015-04-02 02:42
1980년대 중반 부모님과 함께한 이상춘 이사장(뒤).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 효도함으로 기쁨을 드렸다.

사업이 다시 안정되면서 이제 내가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사업에 성공하면 평소 하려던 봉사나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벼르지만 그때가 오는 게 요원한 경우가 많다. 원하는 성공의 기준이 자꾸만 커지기 때문이다. 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시골에 집을 지어드리기로 했다. 이미 사둔 원래 집 근처 땅에 시골에서 보기 힘든 2층 양옥집을 아주 근사하게 지어드렸다.

우리 부모님은 공부를 많이 못하셨다. 그러나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우리 부모님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장남이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우리 자녀들에 대한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자식을 위해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고 행복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절절한 마음에 더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내에게 한 달 생활비 80만원을 줄 때도 부모님께는 200만원을 보내드렸다. 내가 사업한다고 했을 때 격려하며 소 팔고, 논 팔고, 사채까지 빌려 도와주신 부모님이셨다. 이런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가장 큰 재산은 친척과 이웃을 잘 섬기고 돕는 ‘나눔의 정신’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의 시골은 방울장사들이 여러 물건을 한 보따리씩 이고 메고 다니며 팔았다. 이들을 어머니는 집에 들여 밥 해주고 꼭 따뜻한 방에서 재워 보냈고 손님이 오면 결코 그냥 보내는 법이 없으셨다. 내게 연필과 공책 살 돈도 못 주시면서 친척이 오면 돈을 꾸어서라도 차비를 건넸고 무엇이라도 싸서 보내려고 하셨다.

우리 육 남매가 다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부모님 덕분이다. 며느리나 사위 흉을 한 번도 보신 적이 없고 늘 장점을 찾아 칭찬만 하셨다. 그래서 나는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는 격언이 참 맞다고 생각한다. 내가 시골에 내려가 뵈면 내 손을 꼭 잡고 “상춘아,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네가 이렇게 효도 잘하고 동생들 잘 챙겨주니 정말 고맙다”라고 진정어린 표정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폐 안 끼치고 천국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80세에 그대로 되셨다.

시골에서 경운기와 부딪치는 사고가 있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중국 출장 중 소식을 듣고 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정말 믿어지지 않았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사고를 낸 분께 합의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써주었다. 주위에서 경찰에 구속시키고 합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면 돌아가신 아버님이 살아오시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한편으로는 사고를 낸 그분이 너무 밉고 용서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한창 사업할 때 딴생각을 하다 택시와 추돌사고를 낸 적이 있다. 이때 차 안에 미국교포인 노인이 타셨는데 병원서 간단히 진료만 받고 경찰에 신고할 것 없이 그냥 합의해줘 너무나 고마웠던 적이 있다.

내 삶의 모토 중 하나가 남에게 모질게 하거나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내게 이롭지 못하다. 기독교 정신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진리다. 오늘의 내 위치는 바로 내가 만든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남 탓’이라고 하는데 대접받고 싶으면 대접하고 칭찬받고 싶으면 칭찬해야 한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