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이 다시 안정되면서 이제 내가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사업에 성공하면 평소 하려던 봉사나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벼르지만 그때가 오는 게 요원한 경우가 많다. 원하는 성공의 기준이 자꾸만 커지기 때문이다. 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시골에 집을 지어드리기로 했다. 이미 사둔 원래 집 근처 땅에 시골에서 보기 힘든 2층 양옥집을 아주 근사하게 지어드렸다.
우리 부모님은 공부를 많이 못하셨다. 그러나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우리 부모님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장남이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우리 자녀들에 대한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자식을 위해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고 행복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절절한 마음에 더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내에게 한 달 생활비 80만원을 줄 때도 부모님께는 200만원을 보내드렸다. 내가 사업한다고 했을 때 격려하며 소 팔고, 논 팔고, 사채까지 빌려 도와주신 부모님이셨다. 이런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가장 큰 재산은 친척과 이웃을 잘 섬기고 돕는 ‘나눔의 정신’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의 시골은 방울장사들이 여러 물건을 한 보따리씩 이고 메고 다니며 팔았다. 이들을 어머니는 집에 들여 밥 해주고 꼭 따뜻한 방에서 재워 보냈고 손님이 오면 결코 그냥 보내는 법이 없으셨다. 내게 연필과 공책 살 돈도 못 주시면서 친척이 오면 돈을 꾸어서라도 차비를 건넸고 무엇이라도 싸서 보내려고 하셨다.
우리 육 남매가 다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부모님 덕분이다. 며느리나 사위 흉을 한 번도 보신 적이 없고 늘 장점을 찾아 칭찬만 하셨다. 그래서 나는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는 격언이 참 맞다고 생각한다. 내가 시골에 내려가 뵈면 내 손을 꼭 잡고 “상춘아,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네가 이렇게 효도 잘하고 동생들 잘 챙겨주니 정말 고맙다”라고 진정어린 표정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폐 안 끼치고 천국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80세에 그대로 되셨다.
시골에서 경운기와 부딪치는 사고가 있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중국 출장 중 소식을 듣고 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정말 믿어지지 않았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사고를 낸 분께 합의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써주었다. 주위에서 경찰에 구속시키고 합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면 돌아가신 아버님이 살아오시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한편으로는 사고를 낸 그분이 너무 밉고 용서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한창 사업할 때 딴생각을 하다 택시와 추돌사고를 낸 적이 있다. 이때 차 안에 미국교포인 노인이 타셨는데 병원서 간단히 진료만 받고 경찰에 신고할 것 없이 그냥 합의해줘 너무나 고마웠던 적이 있다.
내 삶의 모토 중 하나가 남에게 모질게 하거나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내게 이롭지 못하다. 기독교 정신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진리다. 오늘의 내 위치는 바로 내가 만든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남 탓’이라고 하는데 대접받고 싶으면 대접하고 칭찬받고 싶으면 칭찬해야 한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상춘 (12)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孝 실천
입력 2015-04-02 0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