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맡은 김승훈(73) 한국양봉농협 이사가 땅에 묻힌 노란색 나무상자 뚜껑을 열고 널빤지 모양의 벌집을 꺼냈다. “자 보세요. 여왕벌이 반대편으로 넘어온 거 보이죠? 원래 있던 곳에 알을 낳을 자리가 없었다는 거예요. 벌이 이만큼만 있어도 4월 말이 되면 채밀(꿀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방충복을 덧입은 수강생들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은 올해 도시양봉학교 1기의 세 번째 수업시간. 수강생 26명은 직접 벌꿀을 생산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50, 60대 중년층이 대부분이고 20대 여대생도 있다. 퇴직자인 김진식(61)씨는 “요즘 가짜 꿀이 많아 내가 먹을 꿀은 내가 만든다는 생각으로 왔다”며 “소일거리가 되고 잘하면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 4학년을 휴학 중인 김수인(24·여)씨는 “취업은 생각해본 적이 없고 농업으로 창업을 할 생각”이라면서 “양봉은 시장 가치가 충분하다”고 했다.
벌꿀은 시골에서 만들어져 큰 병에 담겨 있어야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양봉 전문가들은 현대 도시환경이 벌꿀 생산에 오히려 더 적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 이사는 “벌에게 도시는 경쟁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시골은 벌꿀의 원천이 되는 ‘밀원식물’을 둘러싼 쟁탈전이 치열한 반면 도시는 꿀의 재료를 놓고 벌끼리 경쟁을 덜해도 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양봉이 시작된 계기는 ‘꿀벌 없는 세상이 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었다. 2000년대 중반 미국과 유럽에서 꿀벌 개체수가 줄었다는 관측 결과가 보고됐다. 여러 원인이 제기됐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환경이 점차 벌이 살기 좋지 않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유럽연합은 2013년 꿀벌에 해롭다는 살충제 3종의 사용을 2년간 금지시켰다.
벌의 실종을 막기 위해 도시에서 벌을 키워보자는 아이디어가 제기됐다.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 일본 도쿄 등지의 한복판에서 양봉이 시도됐다. 요즘엔 유럽 일부 공항에도 벌집이 매달려 있다.
국내에서는 어반비즈서울(Urban Bees Seoul)이라는 민간단체가 서울에서 벌을 키우기 시작했다. 현재 명동 유네스코회관 옥상을 비롯해 12, 13곳에 50통이 넘는 벌집을 두고 있다. 꿀벌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자는 게 이들의 목적이다. 박진 어반비즈서울 대표는 “벌이 잘 살 수 있는 도시환경이 사람도 잘 살 수 있는 환경”이라고 했다. 어반비즈서울은 최근 ‘사회적기업’으로 변신을 준비 중이다.
도시 양봉의 가능성이 증명되자 이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생겨났다. 양봉은 소자본으로 창업이 가능하다. 다른 농사와 달리 넓은 터도 필요 없다. 퇴직한 사람이 소일거리로 하기에도 좋다. 이런 수요를 파악한 서울 강동구는 지난해 처음으로 도시양봉학교를 열었다. 노원구도 올해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강동구 도시양봉학교는 다른 구민은 신청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높다. 지수지 강동구 도시농업과 주무관은 “지난해는 오전반만 운영했는데 올해는 신청자가 많아 오전·오후반 두 차례로 강좌를 늘렸다”고 말했다.
도시에서 키운 벌꿀의 품질은 좋은 편이다. 도시 양봉을 하는 사람들이 ‘양심적’이어서다. 이들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벌통을 이동시키지 않고, 설탕물을 꿀벌에게 먹이지도 않는다. 박 대표는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친환경적으로 양봉을 한다”고 했다. 도시의 고온건조한 날씨도 꿀벌 생존에 알맞다. 서울시도 2012년 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양봉을 한 적이 있다. 이때 수확한 꿀에 대해 중금속 검사를 실시했는데 안전하다는 판정이 나왔다.
지난해 강동구 도시양봉학교 수강생들은 최근 ‘강동도시양봉농업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중장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사회에도 기여한다는 취지다. 협동조합은 수확한 꿀과 프로폴리스 등 부산물을 직거래 장터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주민들에게 싼값에 아침을 제공하는 사업도 계획 중이다. 협동조합의 신난희 발기인 대표는 “1인당 월 120만원을 벌게 하는 게 목표이며 수익의 10분의 1은 기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도시 양봉이 꿀벌의 실종을 막는 차원보다 도시 생태계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명렬 국립농업과학원 꿀벌 육종연구실장은 “최근 꿀벌이 원하는 만큼 증식되지 않는 것은 맞지만 급격하게 감소하는 건 아니다”며 “꽃이 있는 곳에 벌이 날아다니는 게 자연의 이치이므로 도시 양봉은 생태계의 건전성 복원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
[르포] 꿀벌이 사라지는 시대 ‘도심서 꿀을 따다’… 서울 강동구 ‘도시양봉학교’를 가다
입력 2015-04-01 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