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 2시, 전남 진도 팽목항의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 안을 단원고 2학년 6반 고(故) 권순범군의 어머니 최지영(50)씨가 지키고 있었다. 최씨는 대형 TV에 차례차례 나타나는 아이들 사진의 순서를 외우고 있었다. 사진이 바뀔 때마다 이름을 불렀다. “우리 반(8반) 원석이. 다섯째 아들. 위로 누나만 넷….” 이제 엄마들 얼굴을 보면 아이들 얼굴이 바로 떠오른다고 했다.
“아이들 눈을 쳐다보면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은데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버렸네요. 그래도 우리 아들은 놀러간 게 아니고 인생 수업, 연장 수업하러 간 거예요. 그냥 죽은 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아이들로 인해서 나라가 바뀌고 동생들, 후손들이 더 편히 사는 세상이 되면 먼저 떠난 마음도 편하지 않을까….”
“팽목항이 제일 편해요”
팽목항의 하루는 하릴없이 간다. 최씨는 “6시에 일어나서 씻고 분향소에 앉아 단상을 꾸밀 노란 나비와 꽃 브로치를 만든다. 금방 해가 저무는데 그때 시든 국화를 바다로 띄워 보내는 게 일”이라고 했다.
“차라리 여기 애들 앞에 있는 게 마음이 제일 편해요. 영정사진까지 2m도 안 돼서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으니까. 안 오던 잠도 잘 오더라고요. 처음엔 아예 여기 분향소 영정 앞에서 며칠을 잤어요. 더없이 단 잠을요.”
세 번 계절이 바뀌고 다시 봄이 왔다. 아이들은 지난해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학교 벚꽃나무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는 다시 피어나는 꽃을 보면 가슴이 저릿하다고 했다. 지난 1년은 시간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부분을 팽목항에서 지냈고 이따금 서울에 올라갔다. 광화문광장에도 가고, 국회 앞에도 갔지만 어디서나 ‘기다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4월 그 봄에 마냥 갇혀 있는 부모들 곁을 시간이 스쳐지나간 흔적은 몸에 남았다. 최씨는 “팽목항 지키느라, 청와대로 국회로 쫓아다니느라 모자로 가릴 정신도 없이 맨얼굴로 햇빛을 쐬다 보니 엄마들 얼굴이 하나같이 시커멓게 탔다”고 말했다.
밥은 겨우 누룽지를 끓여 먹는 둥 마는 둥 하기 일쑤였다. 살이 5㎏ 넘게 빠져 얼굴뼈가 드러났다. 19박20일의 세월호 도보행진을 마친 지난 2월 14일 결국 탈이 났다. 대장 일부를 잘라내고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최씨는 “입원 중에도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미칠 지경이었다”고 했다. 퇴원하면서 ‘조심하라’는 의사의 당부를 뒤로 하고 곧장 팽목항으로 돌아왔다. 이날로 3일째다.
다시 아프면 안 된다는 결심이 숟가락을 드는 힘이다. 요즘은 쌀밥에 김치만 있으면 식사를 곧잘 한다. 최씨는 “팽목항을 오가는 가족들 건강이 하나같이 안 좋다”며 “아직 못 돌아온 다윤이의 엄마는 쓰러지기를 반복하면서도 딸 나오기 전까진 병원에 못 간다고 버틴다”고 전했다.
“봄이 오듯 순범이도 왔으면”
261번째. 지난해 5월 5일 오후 7시, 순범이는 그제야 물 밖으로 나왔다. 최씨는 휴대전화에서 아들 시신의 특이사항이 적힌 문서 사진을 열었다. ‘키 177∼182. 기린마크가 있는 파란색 티셔츠에 Wild Animals 글자가 가슴에 위치. 외투 검은 후드티.’ 순범이가 이 옷을 입고 찍은 사진도 함께 내밀었다.
엄마의 직감일까. 수없이 물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도 힘이 없던 최씨는 그날 아침엔 조금 달랐다. ‘왠지 우리 아들을 만날 것 같다’는 느낌에 일찍 일어나 샤워를 했다. 거짓말처럼 저녁에 아들이 돌아왔다. ‘감사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최씨는 “이모, 삼촌들까지 다 내려왔다가 ‘오늘까지만 기다려보자’ 하고 올라가려던 참이었는데 순범이가 나왔다”며 “우리 아들은 끝까지 효자구나 싶어 더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딸은 ‘동생을 드디어 찾았는데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며 차가운 동생 어깨에 기대 동영상을 찍었다.
최씨는 생일에 순범이를 낳았다. 12월 20일이면 모자가 같이 생일잔치를 했다. 두 딸 뒤에 얻은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순범이는 어릴 때부터 울고 떼쓰는 일 한번 없고 화낼 줄도 몰랐다”며 “퇴근하고 돌아오면 어느 날은 빨래를 널어놓고, 어느 날은 개어 놓고, 밥이 떨어지면 밥을 해놨다”고 했다.
최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아들에게 ‘올 한 해 네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어른이 되면 그걸 하면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잘 자라서 어떻게든 더 챙겨 주고 싶은 아들한테 누나들 다 키워두고 모든 사랑을 퍼부을 차례였는데, 아쉽고 미안해서 자꾸 못 해준 것만 떠오른다”며 눈물을 닦았다. 자전거를 사주겠다던 약속을 못 지킨 큰누나는 세월호 ‘기억의 벽’을 꾸밀 타일에 자전거를 그렸다. 작은누나는 ‘보고 싶은 순범, 봄이 오듯 너도 왔으면’이라고 적었다.
다시 4월,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1년 사이 팽목항에는 희생자 가족들이 기거하면서 마을 아닌 마을이 생겼다. 최씨는 ‘살림살이’가 늘어날 때마다 문득 ‘언제까지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다. 그는 “어떤 교육감이 ‘진실 규명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한다’고 했는데 장수하면서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인지 몰랐다”며 “나중에야 그게 얼마나 절망적인 위로였는지 알았다”고 말했다.
최씨는 곧 서울로 올라가 다른 희생자 어머니와 바통 터치를 한다. 요즘 서울·안산이 세월호 관련 북 콘서트와 특별조사위원회 문제 등으로 분주해 당번 교체가 제때 되지 않는다고 했다. 최씨는 “새끼를 낳은 부모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저 애들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은 건데 그게 너무 어렵다. 왜 가족 잃은 사람들이 당연한 걸 요구하며 애걸복걸 길바닥을 헤매야 하는지 화가 난다”고 덧붙였다.
분향소를 지키면서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 때가 많다고 했다. 그는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변한 것도, 이뤄진 것도 없기에 먼저 간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어 그렇다”고 했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가족들 마음을 지탱해준 건 ‘사람’이었다. 참사 1주기를 맞아 이 곳에 찾아오는 이들도 있지만 지난 1월부터 팽목항에 분향소가 차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는 조문객이 늘었다. 주말에는 조문객들을 태운 ‘기다림의 버스’ 등을 이용해 하루에도 몇백명의 걸음이 팽목항에 닿는다. 최씨는 “그만큼 기억하려고 애써 주시는 분들이 있다”며 “뒤에서 받쳐주고 곁에서 함께 걷는 국민들께 참 감사하다”고 말했다.
팽목항=전수민 강창욱 기자
suminis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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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01 02:10 수정 2015-04-01 1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