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정종성] 고통은 꿈꾸게 한다

입력 2015-04-01 02:56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과 무자비한 착취에 대항한 백성들의 저항운동이었다. 당시 지배계층은 백성을 오로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었다.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그동안 들인 비용 충당과 축재를 위해 각종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백성의 고통은 가중됐다.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 중에는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되어 굶어 죽는 자가 많았다.

농민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자들이다. 사회·정치·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추방당한 비존재적인 존재들이었고, 나라의 기억 심지어 자신의 기억에서조차 추방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꿈을 꾸게 한다.

“이 백성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삼는 사람, 이 죽은 시대의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느끼는 사람, 이 죽어 버린 사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만들어 오직 그 고통의 문제와 소통하려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며 드높은 꿈을 꾸던 전봉준의 눈앞에는 사실 고부 군수 조병갑에게 태장을 맞아 피투성이로 가마니에 덮인 아버지 전창혁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며 영화 ‘명량’의 이순신이 선조 임금에게 결전 의지를 담은 장계를 쓰고 있을 때, 안위를 비롯한 부하 장수들은 전쟁이 불가능하다며 집단 농성 중이었다. 급기야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거북선마저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은 꿈을 꾸게 한다.

알프스 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꽃향기를 느끼며 재잘거리는 새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을 상상하던 그 순간,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 굴뚝에서 내려오는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하고 있었다. 고통은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will to meaning)를 꿈꾸게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적 감동에 사로잡혀 있던 때, 다윗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며 사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고통은 경계를 뛰어넘는 환상의 에너지다.

“아버지, 용서하소서.” 위대한 용서의 꿈을 꾸기 시작할 때, 청년 예수는 ‘해골’이라는 장소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눅 23:33). 생명의 의미와 존재를 압살하는 그 십자가 아래에서는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많은 행인들과 관리들,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 군병들과 행악자의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비난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실 소외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며 인간 회복의 꿈을 실천하던 그의 전 생애 동안 그는 고향 주민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귀신 들려 미쳤다고 비난받거나 쫓기고 죽음에 직면하는 위협에 시달렸다. 위대한 꿈은 고통이라는 밥을 먹고 자란다.

‘실신(실업+신용불량)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청년들아, 꿈을 꾸라. 지치고 쓰러져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삶의 부조리와 상처에 무릎을 꿇지 말고 꿈을 꾸라.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고통의 벼랑 끝에 서서 절망의 눈물을 흘릴 때, 겨드랑이를 뚫고 나오는 삶의 가치를 묻는 꿈의 날개를 펼쳐 하늘 높이 솟아올라라.

‘해골’ 위에서 피어나는 용서의 꿈처럼, 진정한 젊음은 삶이 주는 상처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 용기에 있다. 그것이 사순절에 묵상하는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다. 뜨락의 백목련이 겨우내 추위와 싸우며 빚어온 하얀 꿈을 조심스레 펼치고 있는 아침, 고통은 모든 불가능을 꿈꾸게 한다.

정종성 교수 (백석대 기독교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