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춘 (10) “주님, 회개합니다… 100억원대 장학재단 만들게요”

입력 2015-03-31 02:41
한 나눔 행사에 참가한 이상춘 이사장과 맏아들 부부. 자살을 결심할 만큼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다.

1990년부터 민주화운동으로 노사분규가 시작되었고 자동차 생산 업체들이 노조의 파업으로 생산을 중단하면서 전자부품 업체들까지 타격을 받았다. I전기도 노사분규로 두 달간 공장 문을 닫았다. 내게도 서서히 위기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첫 위험신호가 온 것은 1992년 5월 20일이었다. 중국 수교를 앞두고 산업시찰을 15일간 다녀왔는데 직원이 “거래처가 부도났는데 우리가 받아 돌린 어음 1억원을 즉시 막아야 한다”고 했다. 일단 회사 수표를 발행, 사채로 할인해 막았다. 그런데 11월까지 모두 5군데의 거래처에서 5억여원이 연속 부도가 났다. 부도를 막으면 또 부도가 났다.

어음을 발행해 할인한다는 것이 소문나 이젠 할인도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주거래처의 부도로 일감이 모두 사라졌다. 회사는 멈춰 있는 기계와 재고, 사원들만 남아 완전히 폐허 같았다.

이제 또 돌아오는 어음 2억4000만원을 막지 못하면 부도였다.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었다. 나만 쳐다보는 50여명의 직원과 빚 독촉에 시달려야 하는 가족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당시 공과금도 내지 못할 만큼 재무상태가 최악이었다. 은행에 사정을 했지만 액수가 너무 크다며 단박에 거절당했다.

그동안 고생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뇌리를 스치며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무엇보다 부모님을 한번도 호강시켜드리지 못하고 여기서 주저앉는 것이 죄송하고 한스러웠다.

당시 사채업자들의 횡포를 익히 보아온 나는 여기서 내 인생을 접기로 했다. 나 혼자 내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 괴로운 상황을 끝내는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돈 걱정에서 벗어나고 사채업자로부터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라 판단했다. 이때 나는 하루에 1시간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살을 결심한 날, 직원들이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먼저 썼다. 열심히 일해 돈을 많이 벌어 호강시켜드리려 했는데 먼저 이렇게 가게 되어 죄송하다며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다음은 아내에게 썼다. 못난 남편에게 시집와 고생 시키고 빚만 남기고 아비 없는 어린 아들만 당신께 맡기고 가는 못난 나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다음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 차례였다. 늘 바쁘다는 말로 놀이공원에 한 번 데려가지 못하고 이제 와서 너희를 두고 가는 이 아빠를 용서하라고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한번 터진 눈물과 콧물은 마치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 최근의 내 삶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하나님의 인도로 여기까지 왔는데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등 내가 지은 숱한 죄들이 선명하게 생각나기 시작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통한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이전에 절명의 위기 때마다 도와주신 것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산 것을 회개합니다. 성공하면 나처럼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이들을 위해 100억원대 장학재단을 만들겠습니다.”

내 입에서 100억원이란 단어가 나왔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랄 일이다. 2억원도 없어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100억원대 장학재단을 만들겠다고 호언한 것은 결코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시키신 말이었다고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