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中 주도 ‘AIIB’ 가입 봇물… 42개국 끌어당긴 ‘中돈자석’

입력 2015-03-31 02:56
지난 12일 영국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공식 선언했다. 그는 "설립 단계에서 AIIB에 참여하는 것이 영국과 아시아가 함께 성장하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를 줄 것"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다른 서방 국가도 함께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후 미국의 압박에 고민하던 유럽은 영국을 신호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까지 봇물 터지듯 잇따라 가입 선언을 했다. 중국은 고무됐고 끝까지 막아섰던 미국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실패한 대중국 봉쇄정책"이라고 꼬집었다. 로이터통신은 "때로는 지정학적 대변화는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우연히 이뤄진다"면서 "역사학자들이 2015년 3월을 중국이 2차 대전 이후 국제 금융질서를 이끌었던 미국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순간으로 기록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실익을 좇는 국제 질서… 고립되는 미국

중국이 처음 AIIB를 제안했을 때만 해도 미국의 강력한 견제로 머뭇거리는 국가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가입 선언은 막힌 둑을 터트리는 격이었다.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은 AIIB 가입을 재고해 달라는 잭 루 미국 재무장관의 요청을 거절하며 “우리가 서방국 최초로 AIIB 창립 멤버가 되기로 한 이유는 미국도 이 새로운 국제기구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AIIB 가입으로 미국이 앞장서 구축해 온 반(反)AIIB 전선에 결정적인 균열이 벌어졌다”며 “AIIB라는 ‘신포도’가 미국을 고립시키고 위선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의 한 외교 소식통은 “처음 중국과 미국의 싸움이 이 정도로 미국의 완패로 끝날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다른 소식통은 “미국은 중국이 AIIB를 만든다고 했을 때 투명성 문제 등을 거론하며 견제했다. 하지만 중국의 태도는 달랐다. 일단 만들어놓고 들어와서 다양한 문제점을 논의하자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요구와 의견을 수렴해 왔다”고 말했다. 실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8월 몽골 방문 당시 “모두가 중국의 발전이라는 열차에 올라타기를 바란다. 고속열차도 좋고, 무임승차도 좋다. 중국은 다 환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중국은 친성혜용(親誠惠容)이라는 외교 철학을 최근 부쩍 강조하고 있다. 친밀, 성실, 혜택, 포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웃과 친하게 지내고 성실하게 대하며 혜택을 주고 포용하겠다”는 뜻이다. 중국이 AIIB 가입을 유도했던 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중국 주변의 개발도상국들은 중국이 이끄는 AIIB에서 희망을 보고 있다”면서 “미국의 반대는 미국의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평론통신사 덩관잉은 칼럼에서 “새로운 지역 금융네트워크 탄생을 앞두고 일본만 미국 옆을 지키고 있다”면서 “결국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든 그의 후임자이든 허리를 숙이고 AIIB에 가입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은 왜 AIIB를 만들었나

①명분: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세계은행(WB) 등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체제의 지원을 받으며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자 1위 무역국으로 성장했다. 중국은 경제 규모에 걸맞은 목소리를 내고 싶어했다. 우선 WB나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에서 지분을 늘리는 방식 등으로 발언권을 높이려 했지만 미국과 일본의 벽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며 한계를 느꼈다.

중국은 주변국을 비롯한 각국에 ADB를 벗어나 AIIB를 만들어야 하는 명분을 제시했고 설득력을 얻었다. 가장 먼저 개발도상국을 위해 존재해야 할 기존 금융기구들이 선진국의 이해관계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66년 출범한 ADB는 지금까지 9명의 총재가 모두 일본인일 정도로 일본과 배후의 미국이 독식해 왔다. 일본과 미국은 지분율 15.60%씩 갖고 두 나라의 뜻에 반하는 투자는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다.

네이선 시츠 미국 재무부 국제담당 차관보는 지난 1월 언론 기고를 통해 AIIB의 문제점을 열거하면서 “개발도상국 개발 프로그램은 환경 파괴나 노동 착취 우려가 있는 사업을 배제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중국은 이런 원칙을 가볍게 여길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역으로 이점을 파고들었다. AIIB에 가장 먼저 참여한 아시아지역 개발도상국들의 불만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쉬자쥔 WB 전 고문은 BBC중문망 기고에서 “환경보호 등에 대한 WB와 ADB의 까다로운 기준은 발전 단계가 다른 각 나라의 제약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개도국의 경제발전에 해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쉬 전 고문은 특히 “과도한 규제와 제한은 오히려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의 환경이 될 수 있다”면서 ‘중국이 따로 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명했다.

②실리: AIIB는 중국 신창타이 경제 발전을 위한 든든한 지원군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30년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고도 성장기를 접고 연착륙을 도모하고 있다. 중국은 이를 ‘신창타이(新常態·뉴노멀)’라는 말로 표현한다. 당분간 7% 안팎의 중·고속 성장을 유지하면 중국 경제의 구조를 개혁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진핑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구상이다. 중국의 중서부와 주변국을 묶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바로 AIIB는 일대일로 사업을 위한 든든한 자금줄이 될 수 있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말 기준 3조8400억 달러(약 4384조원)에 달한다. AIIB는 넘치는 외환보유액의 효과적인 분산 투자의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다. AIIB에 대한 출자를 통해 외환보유액을 줄이면서 국제 금융체제 재편의 계기도 마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셈이다. 여기에 중국 경제 구조조정의 최대 난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과잉생산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중국에서는 통신과 고속철, 전력, 원자재 분야 등에서 공급과잉과 수요 부진이 심각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

AIIB의 성공 가능성과 중국의 도전

지난해 10월 AIIB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식 직후 러우지웨이 중국 재정부장은 인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AIIB는 아시아 인프라 건설에 치중하는 반면 기존의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등의 다자개발은행은 빈곤 감소를 주요 목표로 삼는다”면서 “AIIB와 기존 기구는 상호보완적이면서 비경쟁적인 관계”이라고 규정했다. ADB는 2020년까지 아시아 국가 인프라 건설에 매년 8000억 달러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예측한 바 있다. 하지만 ADB가 인프라 건설에 제공하는 대출 규모는 매년 100억 달러에 불과하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AIIB와 밀접한 협력방안에 대해 이미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히는 등 기존 기구들도 AIIB에 대한 견제보다는 협력을 외치고 있다. 그만큼 AIIB의 역할이 앞으로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은 AIIB 외에 중국·러시아·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참여하는 ‘브릭스(BRICS)개발은행’ 설립을 주도하고 있다. ‘신개발은행(NDB)’으로도 불리는 이 은행은 회원국이 100억 달러씩 출자해 내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이 AIIB와 NDB를 통해 미국이 독점해 온 국제 금융 시스템 도전에 나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광둥외국어무역대 전략연구원 샤오야오페이 연구원은 “AIIB의 설립과 성공은 중국이 대국으로서의 역할을 발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경제안보 전문가인 장퉁도 “AIIB가 지역성을 띤 다국적 은행으로서 세계은행 및 국제통화기금(IMF)의 기능을 보완하는 동시에 기존 국제 금융 시스템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독점에 대항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중국이 경제력을 앞세운 단순한 ‘힘’이 아닌 진정한 권위를 갖출 수 있을지는 향후 AIIB의 지분 협상과 운영 과정 등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맹경환 특파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