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춘 (9) 골프에 푹 빠져 주일엔 교회 대신 골프장으로

입력 2015-03-30 02:22
1990년대 초 모범사원을 선발해 시상하는 이상춘 이사장(왼쪽). 사업은 88서울올림픽 특수를 타고 승승장구했다.

부도를 예감하고 일단 미국으로 건너간 I전기 사장은 부도 직전까지 자신을 믿고 납품을 해준 회사들의 피해만큼은 막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동분서주하며 제품 수주를 받았고 계약금과 금형비를 선불로 받아 한국에 온 뒤 L/C를 담보로 돌아오는 어음을 막은 것이다.

I전기는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고 이제부터는 로컬로 결제하겠다고 했다. I전기는 다시 정상을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저임금을 무기로 수출품의 주문은 생산을 다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 물량이 많아지자 I전기 위기 때 의리를 지키며 도움을 준 우리 회사에 단연 우선권이 주어졌다. 우리는 평소 물량보다 두 배 이상을 받았다. 완전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내가 바보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것이라 믿는다.

수작업의 한계를 느껴 일본의 좋은 자동기계에 눈을 돌렸다. 일본 오파상을 수소문해서 찾았다. 수작업을 하면 세 사람이 하루 5000∼6000개를 만들어 내던 제품을 일본자동기계로 생산하면 6만∼7만개까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 기계야’ 하고 무릎을 쳤다. 품질도 훨씬 좋을 뿐만 아니라 원자재비도 20% 이상 절감됐다.

문제는 대당 3000만원하는 기계값이었다. 엄청 비쌌다. 일본 오파상은 내가 사장 아들인줄 알았다가 사장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랐다. 내 나이 서른이었으니 말이다. 2대를 주문하자 최대한 가격을 낮춰 줬는데 그는 너무 싸게 주어 회사서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기계를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아 기계값을 주었고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니 적은 노력으로 큰 수입이 이어졌다. 이것을 계기로 기계 자동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국내에 몇 대밖에 없는 와이어커팅기 등 고가의 기계를 연이어 수입, 히트를 쳐 나갔다. 5층 건물의 공장을 지어 ‘원일정공’이란 회사간판을 걸었다. 일본제 최첨단 와이어커팅기 6대를 돌렸는데 이 사업은 내게 엄청난 수입을 보장해 주었다. 뭐든지 앞서서 개척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부담도 있는 반면 대박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때 유망 중소기업에 금리혜택을 주는 제도도 있어 도움을 받았다.

어느 날 주 거래처 임원의 권유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골프 이전에 나는 테니스를 6년 이상 즐겨왔다. 골프를 시작해 보니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1년 만에 싱글이 될 정도로 열정을 가졌다. 거래처에서는 주말마다 설악산이나 제주도로 골프를 치러가자고 호출이 왔다. 그들의 요구에 응하면 당연히 교회는 갈 수 없게 되었다. 그 횟수가 잦아지고 골프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도 몰래 이 같은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거래처에서 불러주지 않으면 내가 어디로 가자고 제안도 하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청소년기가 없었다. 15살에 서울에 올라와 기술을 배우다 21살에 사업을 시작해 낮에는 일, 밤에는 고등학교 야간반에서 학업에 열중하다가 31살에 골프를 배워 전국을 다녀보니 너무나 세상살이가 즐거웠다.

사업은 88서울올림픽 특수로 승승장구하고 서울 화곡동 45평 아파트에 입주, 잘나가는 회사 오너로 수십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잔뜩 폼을 내고 있었다. 교회는 부천 참된교회에 출석했지만 생각나면 한 번씩 가는 곳으로 점점 신앙생활에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