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9월 8일 정오, 프랑스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서는 미·일 간 비공식 회동이 시작됐다. 호스트는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대장성 재무관, 게스트는 미국의 로렌스 서머스 재무부 부장관이었다.
그해 7월 2일부터 시작된 태국 바트화의 폭락, 훗날 ‘아시아 외환위기’라고 알려진 사태의 수습 문제가 화제였다. 자연스럽게 사카키바라 재무관은 아시아통화기금(AMF)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일본의 AMF 구상을 피력한 것이다.
주장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일명 세계은행·WB)이 전후 각국의 경제개발에 크게 기여했지만 66년 아시아 지역의 개발·부흥을 전담하기 위한 아시아개발은행(ADB)이 만들어진 선례가 있는 만큼 국제통화기금(IMF)과는 별도로 AMF가 탄생해도 좋겠고, 게다가 지금 아시아는 매우 심각한 통화위기에 직면해 있으니 전담 지원조직의 결성이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서머스도 큰 반대는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불과 한 주일 만에 돌변했다. 그해 9월 14일 서머스 부장관은 사카키바라 재무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도 모자라 미국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을 앞세워 미쓰카 히로시 일본 대장성 대신에게 일본의 독자적인 행보는 결단코 수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AMF 구상은 그렇게 좌절됐다. 사카키바라, 구로다 하루히코(현 일본은행 총재) 대장성 국제금융국장 등은 아시아 각국을 방문해 설득했고 한국을 비롯해 적지 않은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얻었으나 미국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탈냉전 이후 아시아 역내 주도권을 구축·확대하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태국 사태를 계기로 표출됐으나 사려 깊지 못한 섣부른 길 찾기는 실패로 주저앉았던 것이다.
사카키바라는 ‘일본과 세계가 떨었던 날’(2000)에서 미국을 설득할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이라고 그때를 회고했다. 하지만 탈냉전 이후 다극체제의 등장을 크게 경계했던 미국을 설득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전후 세계경제 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의 위상 하락은 이미 시작됐고 탈냉전은 이를 더욱 가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한국이 지난 26일 참가를 공식선언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은 중국이 주도하고 있고 아시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AMF 구상과 유사하다. AIIB 출범을 달가워하지 않는 미국의 태도도 비슷하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에게 압박을 가했던 97년의 모습이 이미 아니었다. 미국의 위상은 당시보다 더 위축됐고 상대적으로 중국의 부상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앞 다퉈 AIIB 참여 선언을 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 와중에서 한국은 적잖은 맘고생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의 그러한 행보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의 상대적인 쇠약과 중국의 빠른 부상을 감안해 어느 쪽에 줄을 설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만 현실을 바라봐서는 결코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주어진 틀 안에서만 문제를 풀려다보면 그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적잖은 줄서기 압력을 받고 있으나 한 번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존재는 없어지고 강대국의 주장은 더욱 거세질 뿐이다. 자부심에 바탕을 둔 실리 위주의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광야에서 금식하던 허기진 예수는 돌로 빵을 만들라고 압박하던 악마에게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고 일갈하지 않았던가. AIIB도 그렇지만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나 그 무엇이 됐든 한국은 한국의 길을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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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래 칼럼] 미·중 틈바구니에서도 우리 길 있을 것
입력 2015-03-30 02:35 수정 2015-03-30 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