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GDP 숫자놀음은 이제 그만

입력 2015-03-30 02:20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북유럽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을 때 피식 웃기도 했다. “형, 미칠 듯이 답답해요. 매일 12시간씩 일을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죠? 월급명세서에 찍힌 숫자가 행복은 아니잖아요. 내가 사는 이 사회가 너무 답답하고 싫어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대화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헤어질 때쯤 후배는 지난 2일 퇴임한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했던 말을 들려줬다. “우리는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이다.”

며칠이 지나 늦은 시간에 택시를 탔다. 하얗게 머리카락이 센 기사께서 백미러로 흘금흘금 살피더니 말을 걸었다. “밤늦게까지 일하시고 피곤하시겠네요.” 마침 라디오에서 2001년부터 2013년까지 가계소득 증가율은 연평균 5.7%인데 기업소득 증가율은 9.7%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기업은 돈을 버는데 국민들은 쪼들리니 참 이상하죠.” 대꾸하기 애매해 그냥 창밖만 바라봤더니 다시 말을 건넸다.

“내가 젊을 때는 정말 죽기 살기로 일했죠. 그때는 적어도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 경제적 행복을 누렸어요. 워낙에 먹고사는 게 힘들었던 때니까.”

“그때는 그러셨겠죠.”

“그런데 선진국이 되면 국민들이 다 행복해집니까? 경제성장률이 6%가 되면 국민들 주머니가 두둑해집니까?”

“그래도 경제 전체 규모가 커지면….”

“파이를 키우면 서로 나눌 몫이 많아진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한참 복지니 경제민주화니 떠들더니 쏙 들어갔네요. 젊은 애들이 왜 불만이 가득하고 불안해하는지 아세요?”

대답이 궁색해졌다. “저기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자마자 세워주세요.” 짧은 대화는 뒷맛을 남기고 끝났다.

지난 19일 청와대에서 무역투자진흥회의가 열렸다. 막 중동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은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

곧바로 비아냥이 쏟아졌다. 2001년 813만 관객을 모은 영화 ‘친구’에 나왔던 대사의 패러디까지 등장했다. “니가 가라, 중동.”

이민을 가겠다는 후배, ‘지금’을 안타까워하는 택시기사, 대통령 한마디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에겐 ‘신뢰의 상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뢰의 빈자리엔 갈등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1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국 가운데 사회갈등지수가 무려 5위다. 그리고 갈등의 뿌리는 불평등이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불평등의 대가’라는 책에서 분배의 불평등이 갖는 엄청난 폭발력을 경고했다.

우리가 안고 있는 갈등이 폭발하기 전에 ‘높으신 분’들이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 ‘수출 주도의 성장을 위한 성장’이 아니라 ‘내수 중심의 분배를 위한 성장’으로. 기업 감세나 규제 완화, 수출 위주 정책으로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걸 비싼 수업료를 내고 충분히 배웠다. ‘경제성장’이라는 수단이 ‘국민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압도해서는 안 되잖나.

영화 ‘친구’에서 주인공 동수는 습격을 당해 죽어가며 한마디를 내뱉는다.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747’이니 ‘경제민주화’니 온갖 공약과 구호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국내총생산(GDP) 숫자놀음은 이제 그만하자.

김찬희 사회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