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출생한 필자는 전후 세대이자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고 올해 환갑을 맞이한다. 식민지시대나 태평양전쟁, 6·25전쟁을 경험하지 않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근대화와 민주화, 세계화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다. 벌써 15년 전 일이다. 봄학기 첫 수업에 들어갔는데 북한을 갓 탈출한 늦깎이 신입생이 앉아 있었다. 북에서 인민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무역업에 종사하다 탈북했고, 통일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에 북한학과를 지원했다고 한다. 나와 동갑내기이자, 흔치 않은 북한군 장교 출신이라 강의시간 외에도 시간을 내어 북한 정세도 논의하고 개인 상담도 하곤 했다.
남북에서 각각 경험했던 게 민족의 역사
1968년 북한이 미국 정보함인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특수부대를 남파시켜 청와대를 기습하려는 도발이 있었다. 한반도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공비 소탕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했지만, 당시 막 중학교에 합격한 나로서는 일상에 지장 없이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반면 북한에서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던 탈북 장교는 당시 할머니 손에 이끌려 평양 외곽으로 소개돼 몇 달을 힘들게 지내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고등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1975년 4월 8일, 고려대 학생들의 반유신 데모가 연일 계속돼 정부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해 휴교령이 내려지고 캠퍼스에 군이 진주했다. 당시 2학년 학생으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채 매일 학교 앞 다방이나 막걸리집에 모여 세월을 보내다 월남 패망 소식을 접하며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탈북 장교 역시 1975년 월남 패망 당시를 뚜렷이 기억한다면서 하급 전사로 군에 복무하던 중 통일의 기회를 앞당기기 위해 일전을 각오하며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보냈다고 한다. 김일성은 휴전선 일대를 시찰하고 제2차 조선전쟁이 발발하면 잃을 것은 휴전선이요 얻을 것은 통일이라고 호언했다 하니 병사로서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90년대 초, 통일연구원에서 통일정책을 연구하면서 남북한 상황이 180도 역전돼 있음을 실감했다. 북한의 붕괴 가능성이 연일 제기되면서 우리 주도의 통일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북에서 군 간부로 성장한 탈북 장교는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중국을 드나들며 외화벌이 사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남한이 잘살고 중국이 한국과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면서 북한체제에 대한 회의와 절망감으로 흔들리게 됐으며 결국 목숨을 걸고 탈북하게 됐다.
민족 전체의 삶 복원 위해 과거와 대화를
이처럼 개인의 삶을 맞춰보면 역사 인식의 빈 공간을 메울 수 있다. 분단된 지난 70년 동안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공간은 단절됐지만 시간은 공유했다.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느끼고 살아왔다.
지난 70년은 단절의 역사였지만 남북한 개개인 삶의 궤적을 모아보면 새로운 민족의 역사가 된다. 분단 후 20여 차례 성사된 이산가족 상봉에서 우리는 수천, 수만의 이산가족들이 지난 세월 동안 각자의 인생 흔적들을 맞춰보려는 애절한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1000만 이산가족만이 아니라 우리 8000만 민족은 광의의 이산가족이다.
분단 70년, 이제 우리는 민족 전체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과거와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분단 70년, 우리 개개인의 생애사를 통한 과거와의 대화는 단절을 넘어 통일의 미래를 여는 역지사지의 통로가 될 것이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한반도포커스-유호열] 전후세대 개인사로 엮는 통일준비
입력 2015-03-30 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