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진애] 사월은 잔인한 달

입력 2015-03-30 02:20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는 T S 엘리엇의 그 유명한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월은 잔인한 달이다.

죽었던 땅에서 만물이 소생하는 달, 생명의 파릇파릇함이 세상을 덮는 달, 갖가지 모습으로 아름다움이 만발하는 달. 그러나 그 소생하는 생명의 아름다움은 내가 갖지 못한, 잃어버린, 다시는 같이 하지 못하는 고통을 더 아프게 한다.

이 시의 제목이 ‘황무지’이다. 세월은 때가 되어 아름답게 피어나도 마음은 황무지로 변한 심정을 아는가?

자연은 이토록 눈부시건만, 사람 세상은 이토록 황폐한 황무지 같아야만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의 황무지에도 새싹이 돋고 꽃이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

“어떠한 슬픔도,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견뎌낼 수 있다.” ‘바베트의 만찬’을 쓴 작가 이사크 디네센이 한 말이다. 슬픔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하면 맺힌 것이 풀어진다.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슬픔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같이 있음을 기뻐하는 행위이다. 말을 하면 분노도 누그러진다. 이야기를 하면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피어오를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정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누르려고만 한다. 용산 참사, 천안함 참사, 세월호 참사 등에서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법조문이나 정부 행사에서 쓰는 형식적인 기념 언어만 쓰려한다. 그런데, 슬픔은 그 깊은 속을 이야기하지 못하면 점점 절망으로 변하고, 절망은 이윽고 분노로 변하고, 분노는 언젠가 폭발한다.

다른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함을 증명해야 하는 슬픔,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슬픔, 아파도 병원에 마음 놓고 가지 못하는 슬픔, 혼자 외로이 세상을 뜨는 슬픔.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 슬픔 등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는가? 그 슬픔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게 하라. 그래야 문제도 풀리고 한이 되지 않는다.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가장 인간성이 살아있는 사회다. 잔인한 사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김진애(도시건축가)